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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월급 25%나 줄어 택배 뛰어요"…'워라밸' 뺏은 주52시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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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52시간 확대 시행 1년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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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소재 한 뿌리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 모씨는 요즘 퇴근 후 청소대행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박씨가 투잡을 뛰는 이유는 지난해부터 회사에 주 52시간제가 적용되면서 잔업수당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박씨가 다니는 회사에는 퇴근 후 배달대행 업체에서 일하는 동료도 있다. 박씨가 투잡을 뛰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다.

투잡을 뛰는 것은 그나마 낫다. 고된 주 업무로 투잡을 뛰지 못해 임금 축소분을 오롯이 감내하는 경우도 많다. 경기도에 있는 한 의료장비부품 업체에 다니고 있는 김 모씨는 주 52시간제 적용 이후 임금이 25%나 줄었다.

김씨는 "주 52시간제 적용을 받지 않을 때에는 주 70시간 일하며 월급을 한 달에 400만원 넘게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예전의 75%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있다"면서 "투잡을 뛰려고 해도 워낙 일이 고되기 때문에 몸이 땀으로 범벅된 상태에서 대리운전 등을 할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50인 미만 중소기업에 확대 시행된 지 1년여가 지났지만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임금이 감소하고 여가시간이 줄어드는 등 삶의 질이 되레 악화됐다고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근로자들은 주 52시간제로 줄어든 잔업 수당을 메우기 위해 퇴근 후 투잡을 뛰거나 가족들이 추가로 일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 노사가 협의해 업종별 실정에 맞게 연장근로 시간을 조정하는 근로시간 유연화가 하루빨리 도입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 조선업체 근로자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주 52시간제 전면 시행 1년 근로자 영향조사'에서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조사에 따르면 근로자의 절반 이상(55.0%)은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워라밸(삶의 질)이 나빠졌다"고 응답했다. 반면 "좋아졌다"는 답변은 13.0%에 불과했다.

직원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대표들의 한숨도 깊어지고 있다. 주 52시간제가 직원들의 휴식을 보장하기는커녕 업무 효율성을 되레 저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오선 동아플레이팅 대표는 "주 52시간제를 시행한 이후 수익이 떨어져 투잡에 뛰어든 직원들이 생겼다"며 "투잡을 뛴 직원들은 다음날 피로도가 높아지다 보니 회사 입장에서는 생산성이 떨어지고, 직원 입장에서는 삶의 질이 저하되는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토로했다.

주 52시간제와 함께 최저임금이 인상되면서 전문 인력을 구하는 것도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제조업 관련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뿌리업종이 겪는 어려움이 크다. 우선 최저임금이 오르며 전반적인 임금 수준이 단순 업무를 하는 근로자와 큰 차이가 없어졌다. 이 가운데 연장근무를 통한 추가 수당 기회도 사라지면서 전문 인력이 단순 업종으로 이탈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소기업계는 실효성이 없는 주 52시간제를 보완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 대표는 "현장 근로자와 사용자 중 한쪽이라도 만족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주 52시간제는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제도"라며 "핵심 인력에 대해서는 근로자와 사용자 간에 합의를 하면 연장근무를 허용하는 쪽으로 대책을 마련해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주 52시간제의 대안으로 근무시간 한도를 월·연 단위로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일감이 적을 때는 장기 휴가를 주고 일감이 많을 때는 추가 근로를 하면 중소기업은 적기에 수주 물량을 납품할 수 있고, 근로자는 추가 소득을 얻을 수 있어 '윈윈'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연장 근로시간 규제가 '주' 단위로 이뤄져 '연·월' 단위로 근로시간을 규제하는 일본에 비해 촘촘하게 적용되고 있다. 일본은 노사가 합의할 경우 최대 월 100시간, 연 720시간까지 연장근무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탄력근로제, 선택근로제와 같은 유연근로제도가 있다. 다만 이 같은 제도들은 결국 주 평균 40시간을 맞춰야 한다는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아예 월·연 단위로 근로시간 한도를 정해 추가 근로를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도저히 인력을 구할 수 없어 주 52시간을 지키기 힘든 중소기업을 위해 일본처럼 노사가 합의하면 최대 연 720시간의 연장근로도 가능하게끔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주당 근로시간을 강제로 규제하기보다는 근로시간을 줄이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프랑스는 근로시간 단축 정도에 따라 사회보장분담금 감면 혜택을 주거나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고용창출을 많이 한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 인센티브를 준다. 독일은 근무 단축으로 발생하게 되는 근로자의 소득 감소를 보상하기 위해 정부가 일부 급여를 추가로 지원하고 있다.

천편일률적인 주 52시간제를 개편해야 한다는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윤석열 정부의 주 52시간제 유연화 논의도 한층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특히 수출 중소기업이나 혁신기업은 최근 수주 물량이 증가하면서 인력 수요가 많다"며 "이들이 코로나19 경기 회복에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인력난 등 주 52시간제로 타격을 받지 않도록 정책적으로 세밀히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정지성 기자 / 신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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