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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유레카] 한반도와 대만 현대사는 왜 연동될까/박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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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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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강 주미 중국대사는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항의하며 지난 4일 <워싱턴포스트>에 쓴 기고에서 “대만은 1800년 동안 중국 영토의 분리할 수 없는 일부였다”고 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대만 섬에는 석기시대부터 한족과는 다른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 17세기에 네덜란드와 스페인 등 유럽 제국들이 점령 통치를 하면서 노동자 등으로 부리려고 한족들을 대규모로 이주시켰다. ‘타이완’이란 명칭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대만섬 남쪽 주둔지를 그 지역 원주민 부족의 이름을 따 ‘Tayouan’으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1683년 청나라가 대만섬을 근거로 명 부흥운동을 벌이던 정성공 세력을 무너뜨리면서 대만에 대한 중국 본토 왕조의 통치가 처음 시작되었다.

19세기 말부터 한반도와 대만의 운명은 깊이 연결되었다.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다투며 일본과 벌인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대만을 일본에 내줬다. 한반도와 대만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 한 해 뒤인 1949년 공산당에 패배해 중국 대륙을 잃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대만에 정부를 세웠다. 이 시기에 미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할 뜻이 없었다. 미국 정부 내 많은 인사들이 장제스를 신뢰하지 않았고, 중국공산당과의 협력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미국은 대만 방어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미 중앙정보국(CIA)은 장제스 정권이 1950년 말까지 버티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상황을 바꿨다. 미국은 이틀 뒤 대만해협에 미군 7함대를 보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틈에 대만을 점령해 공산주의가 더욱 확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장제스 정부가 본토를 공격해 충돌이 확대되는 것도 막으려는 이중의 포석이기도 했다. 대만은 이렇게 ‘우연히’ 살아남았다.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맺어진 뒤, 중국은 미국이 대만과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막으려고 1954년 9월3일 대만의 진먼다오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다. 제1차 대만해협 위기다. 하지만 중국의 도발은 미국과 대만의 협상을 오히려 가속화시켰다. 1954년 12월2일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냉전 시대 한국에서 중화민국은 ‘자유중국’으로 불렸지만, 실제로는 계엄령 하의 반공 독재 통치가 계속되었다. 1980년대 말 한국과 대만에서 나란히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양쪽 시민들이 제대로 소통하고 교류하기도 전에, 1992년 8월24일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는 단교했다.

중국이 대만해협을 포위하고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이던 지난 5일 주한미군의 U-2 정찰기가 대만해협으로 출동했다고 한다. 대만의 위기는 한반도와 연동된다. 한반도와 대만은 대륙과 해양의 강대국이 패권 경쟁을 벌일 때면 전략적 가치가 상승하나, 그 때문에 위태로워지는 동병상련의 이웃이다. 박민희 논설위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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