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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조현철의 나락 한 알] 법과 원칙? 법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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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대우조선해양 파업으로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의 척박한 노동 현실이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현재 총 10만여 조선업 노동자의 70%가량이 하청노동자이며 임금은 20~30년 경력에도 월 200만원 정도로 최저임금을 겨우 넘는다. 대우조선해양은 2014년 대비 임금이 30% 넘게 줄었다니 파업 때 요구한 30% 임금 인상은 그간의 물가 인상은 포함하지도 않은, 임금의 원상회복 요구였다. 조선소 일은 고강도 고위험 노동이다. 재해율과 사망률이 제조업 평균의 2배가 넘는 데다 2016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현장에서 숨진 88명 중 77%가 하청노동자였다. 주기적으로 불경기가 닥치면 임금 삭감과 대량 해고도 하청노동자를 겨눈다.

경향신문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이 고약한 현실의 뿌리는 다단계 하청 구조다.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쥔 원청은 겹겹이 쌓아놓은 하청 뒤에 숨는다. 실질적 사용자이지만 법률상 책임이 없다며 모르쇠로 잡아뗀다. 우리나라 사업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공정과 몰상식의 전형이다. 연세대학교에는 생활임금과 샤워실 설치 등 노동조건 개선을 원청인 학교가 보장하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몇 년째 걸려 있다. 실체적 교섭 상대가 없는 하청노동자들은 헌법에 명시된 단체교섭권이 합법적으로 거부되는 이상한 나라에서 산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의 파업은 법이 빼앗은 공정과 상식을 회복하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법과 원칙, 중요성만큼 한계 뚜렷

공정과 상식은 윤석열 정권의 대표 구호였지만, 이제는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하게 되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소동, 부실 인사와 사적 채용 의혹, 행정안전부의 경찰국 신설, 감사원의 표적 감사 의혹, 남 탓하기, 법사와 무속 연루 의혹, 초등학교 학제개편을 비롯한 정책 혼선까지 쉴 새 없이 논란이 일며 언제부턴가 공정과 상식을 ‘법과 원칙’이 대체했다. 의혹에는 합리적 해명 대신 위법이 아니라고 응수하고 대우조선해양 파업이나 입맛에 맞지 않는 전 정부의 정책에는 법과 원칙, 엄정한 수사를 들먹인다.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가 정치를 덮었고 기후위기, 정치개혁, 평등법을 비롯한 사회의 주요 현안은 실종되었다.

법치국가에서 법과 원칙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닌 것도 분명하고 중요성만큼이나 한계도 뚜렷하다. 법과 원칙에 앞서 ‘법의 원칙’을 말하는 까닭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사회의 정의와 공정, 개인의 존엄과 평등을 보장하는 중요한 법이었다. 그런데 안식일 법을 무차별로 집행하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아졌고, 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죄인’이 되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코복음) 당시의 완고한 율법주의에 맞서 예수는 ‘사람’이 법의 원칙이라고 선언하였다. 19세기 말에 일본의 중의원을 지낸 다나카 쇼조에 의하면 인권이 법률보다 무겁다는 것이 법의 원칙이다.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의 보장을 명시한 우리나라 헌법(제10조)에 따르면 인권 보장이 법의 원칙이다. 헌법을 준수한다고 선서한 대통령은 법의 원칙에 따라 법을 적용해야 한다. 법치의 본령은 여기에 있다.

오늘날 하청노동자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 인권을 현실의 법이 지켜주지 못하는 사람을 대변한다. 하청 구조에서 법과 원칙은 ‘진짜 사장’인 원청이 나온 후에 말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주장하는 법과 원칙은 하청노동자들에게 꼼짝 말라는 말과 같다. 이 경우 법의 엄정한 적용은 왜곡된 현실을 유지하거나 악화시킬 뿐이다. 원청인 대우조선해양은 파업이 끝나자 파업노동자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른 7000억원대 손해배상소송(손배소)을 예고했다. 파업 손배소는 파업 노동자에 대한 합법적 사후 보복으로 파업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의 삶이 손배소로 무너졌다. 법과 원칙에 따른다는 이 손배소는 법의 원칙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법치국가라면 법으로 금지하는 게 마땅한, 수사가 아니라 정치가 필요한 사안이다.

대우조선 손배소, 법의 원칙 위배

“기다릴 만큼 기다리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진압의 최적기를 가늠하는 현장 지휘관이나 할 말을 대통령에게서 듣는 것은 곤욕이다. 법과 원칙이 삶을 좀먹는 다단계 하청 구조에 짓눌려 온 노동자들에게 할 말은 더더욱 아니다. “어쨌든 하청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보겠다. 파업 노동자들을 막다른 곳으로 내모는 손배소는 없어야 한다.”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라는 헌법을 지킬 결심으로, 법의 원칙으로 사람을 보듬으며 이렇게 말하는 대통령을 기대하는 건 무리인가. 바위가 아니라 계란 편에 서는 정권을 꿈꾸는 게 비현실적인가, 계란이 이렇게 많은데도. 법의 원칙이 확고하게 서고 인권이 법보다 무거울 때만, 법과 원칙은 삶의 위로와 희망이 된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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