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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詩想과 세상] 여름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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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어린 새가 전깃줄에 앉아 허공을 주시한다 한참을 골똘하더니 중심을 잃고서 불안한 오늘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나의 비행은 어두운 뒤에서 이루어졌다 학교 뒷산, 농협창고 뒤, 극장 뒷골목 불을 켜지 않은 뒤편은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뒤보다 앞이 캄캄하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백열등을 깨고 담배연기 자욱한 친구의 자취방을 박차고 나온 날, 전깃줄에 걸린 별 하나가 등을 쪼아 댔다 숙제 같은 슬픔이 감전된 듯 저릿하게 퍼지는 개학 전날 밤, 밀린 일기보다 갈겨 쓸 날들이 무겁다는 걸 알았다

새가 날 수 있는 건 날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 속의 무게를 훌훌, 털어 버리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게 날갯짓이라면

모든 결심은 비상하다

박은영(1977~)

짧은 여름방학은 늘 아쉬웠다. 동무들과 개울에서 미역을 감거나 신작로 양옆에 서 있는 미루나무에서 매미를 잡거나 새알 같은 먹을 걸 찾아 들로 산으로 쏘다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어스름할 때쯤 집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혼나기 일쑤였다. 여름날의 해는 길기만 한데 개학은 한순간에 다가왔다. “개학 전날” 낮에는 곤충·식물채집을 하고, 밤에는 밀린 일기를 쓰다 보면 하루하루 날씨가 흐렸는지 맑았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보니 방학도 없다. 개학 전날의 “숙제 같은 슬픔”보다 불안한 건 사회 진출이다. “어두운 뒤에서 이루어”진 비행으로 눈앞이 더 캄캄하다. 밀린 일기처럼 그날그날 살다 보면 삶은 통째로 밀리고, 장래는 아득하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누구나 불안하다. 새는 날개만이 아니라 “제 속의 무게를 훌훌, 털어 버리는 까닭”에 난다. 새의 비상(飛上)처럼 험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비상(非常)한 결심이 필요하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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