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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김순호 경찰국장 ‘대공특채 배경’ 논란 확산…인노회 “직접 진실 밝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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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노회 ‘넘버2’ 활동하다 잠적…회원들 잇따라 경찰에 연행

당시 연행된 회원 “김순호만 알 수 있는 조직표, 경찰이 파악”

김 국장, ‘활동 고백’은 인정…“골수 주사파 안 되려고” 해명

경향신문

최동 열사 ‘32주기 추모제’ 김순호 경찰국장과 함께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에서 활동했던 최동 열사의 32주기 추모제가 7일 경기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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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에 임명된 김순호 치안감이 1989년 ‘대공특채’로 임용된 배경을 놓고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김 국장이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활동을 하다 돌연 종적을 감춘 시점을 전후해 인노회에 대한 경찰 수사가 시작됐고, 인노회가 와해된 뒤 김 국장이 경찰에 특채됐기 때문이다. 인노회 회원들은 김 국장에게 “과거 행적에 대해 진실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김 국장은 경찰에 인노회 활동을 ‘고백’한 게 맞다면서도 “골수 ‘주사파’로 빠지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김 국장의 성균관대 81학번 동문과 인노회 회원들은 7일 경기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제32주기 최동 열사 추모제를 열었다. 이들은 “김 국장은 1988년 인노회에 가입해 활동하다 1989년 치안본부가 인노회를 탄압할 무렵 자취를 감춘 뒤 그해 8월 경장으로 특채돼 군부독재정권 시절 암약했던 ‘밀정’으로 의심받아왔다”며 “그가 치안본부의 부활이나 다름없는 경찰국 초대 국장이 된 것에 인노회 사건 관련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국장과 인노회의 인연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국장은 1983년 3월 운동권 서클에 가입해 시위를 주도하다 군에 강제징집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끌려가 심사를 받았고, 관리번호 1502번의 ‘B급 관리 대상’이 되었다.

이후 김 국장은 서클 선배인 최동씨를 따라 인노회에 가입했다. 1988년 3월 결성된 인노회는 인천·부천 지역 노동자들이 모인 대중 노동운동 단체였다. 김 국장은 ‘김봉진’이라는 가명을 쓰며 부천지역의 조직 책임자인 ‘지구위원장’을 맡았다.

조직 내 ‘넘버2’로 불린 김 국장은 1989년 4월 무렵 돌연 자취를 감췄다. 김 국장의 행적이 묘연해진 시점을 전후해 인노회에 대한 경찰 수사가 전방위로 시작됐다. 1989년 1월 말부터 인노위 회원들이 치안본부에 연행됐다. 같은 해 4월28일 김 국장의 선배인 최동씨가 연행됐고, 김 국장이 관리한 부천지구 일반회원들까지 조사를 받았다.

주요 활동가들이 1989년 6월 기소돼 조직은 해체됐다. 인노회 사건 관련자 총 18명이 연행돼 15명이 구속됐다. 1990년 8월7일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최동씨는 분신자살을 했다.

김 국장은 1989년 8월 대공특채로 경찰관이 됐다.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김 국장은 당시 경찰공무원임용령에 따라 ‘대공공작업무와 관련 있는 자’로 분류돼 치안본부 대공3과 소속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했다. 김 국장은 2년6개월 후인 1992년 2월 경사로 특별승진했고, 입직 5년9개월 만인 1995년 5월 경위로 승진하는 등 진급 속도가 이례적으로 빨랐다고 이해식 민주당 의원은 전했다.

인노회 회원들은 과거 경찰 조사 때 김 국장만이 알고 있을 만한 정보를 경찰이 꿰뚫고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1989년 4월29일쯤 치안본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A씨는 “진술을 거부하니 경찰이 전체적인 조직표를 보여줬고 부천 몇몇 지역의 정보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A씨는 “부천지구 밑에 분회가 8개 정도에 달하고 다른 분회 사람들은 명단을 모른다. 전체적으로 파악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김순호”라고 했다. 부천 회원으로 치안본부 조사를 받은 B씨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지구장(김순호) 정도뿐”이라고 했다.

김 국장의 친구로 인노회 활동을 함께한 C씨는 김 국장이 경찰이 된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C씨는 “ ‘동형(최동)과 가까웠던 건 너인데 왜 (추모제 등에) 안 왔냐’고 물으니 ‘절에 들어가서 경찰시험 공부하느라 세상과 담을 쌓아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고 전했다. 김 국장이 대공특채로 경찰에 첫발을 들인 시점이 1989년 8월인 점을 감안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이다.

김 국장은 인노회 활동에 회의를 느껴 치안본부를 찾아가 고백했을 뿐 동료들에게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언론 인터뷰에선 인노회를 ‘주사파’로 규정하며 “골수 주사파로 더 이상 빠지지 않기 위해 내 자신을 끊어내기 위해 (당시 경찰을) 찾아가게 된 것”이라고도 했다. 김 국장은 이날 경향신문에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주사파 운동은 노동자의 삶과 권익을 신장시키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노동운동이 아니라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을 실천하는 운동”이라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2020년 재심 판결에서 인노회를 ‘이적단체가 아니다’라고 확정했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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