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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노동운동→자백→대공 특채’ 경찰국장 때문에 회자되는 치안본부의 1989년 ‘노동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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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무부 주도 ‘노조 이적행위’ 몰이

최근 행안부 대우조선 하청 압박 ‘오버랩’

치안본부 표적 ‘인노회’ 활동했던 김순호

자수 뒤 경찰 특채···인노회 “대가성” 의심

경향신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가운데)이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내 경찰국을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순호 경찰국장. 행정안전부 내에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인 경찰국은 이날 공식 출범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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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을 했던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의 1989년 경찰 입직 과정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면서 1989년에 일어난 내무부 치안본부의 대대적인 노동단체 탄압도 주목받고 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의 지휘아래 노동 사건에 개입한 장면은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최근 행보와 겹쳐 보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7일 행안부 대통령기록관 기록컬렉션을 보면, “노태우 정부는 1988년 말 5공 청문회와 12월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 담화’를 시작으로 노동통제적 성격이 강화됐다”고 쓰여 있다. 1989년 초부터 정부는 내무부 산하 치안본부(현 경찰청)를 앞세워 노동단체 탄압에 나섰다. 이 때는 경찰이 내무부에서 분리되기 전으로 치안본부 아래 지역별 경찰국 형태로 운영됐다. 경찰은 1991년 내무부에서 나와 경찰청으로 독립 외청이 됐다.

당시 정부는 “노동계에 확산된 ‘좌경세력’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라는 명분을 댔다. 내무부 치안본부는 “노동계 파업현장에 불법 요소가 있다면 철저히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고, 대학가와 노동운동을 활발히 하던 노조나 노동단체를 ‘이적단체’로 덮어씌우면서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는 노동운동가나 학생들이 이적행위를 했다며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김 국장이 과거 활동했던 ‘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인노회)도 내무부 치안본부의 주요 타깃 중 하나였다.

당시 노동운동 탄압과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 기조가 행안부(내무부)를 통해 확인된다는 공통점도 발견된다. 노태우 정부의 이한동 내무부 장관은 1989년 3월 치안본부의 ‘진압부대 지휘관 신념화교육’에서 “좌경 민중혁명을 획책하는 폭력세력들의 불법행위를 단호히 배격 저지하기 위해 공권력을 엄정하게 집행해달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집권 이후 노동계 현안 중 하나였던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의 파업 현장을 앞장서 찾은 것은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었다. 경찰국 신설을 추진하며 치안사무를 행안부 장관이 지휘할 수 있다고 보는 이 장관은 노동현안 개입에도 적극적이었다. 파업 현장이었던 경남 거제에선 공권력 투입 가능성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메시지 기조도 1989년과 유사한 “(노조의) 불법행위에는 엄정대응”이었다. 경찰특공대 투입 검토를 지시했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이후 이 장관은 “브레인스토밍 차원이었을 뿐”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한편 김 국장의 경찰 입직 경로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1989년 초까지 인노회 활동을 하다 돌연 잠적했다. 그러다 그해 7월 경찰에 자수했고, 이후 경찰에 특채됐다. 그는 경찰에서 대공 업무 등을 맡는 ‘보안통’으로 주로 일했다.

김 국장은 당시 자수 과정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주사파에게서 (자신을) 단절시키려는 것이었다”는 취지의 입장을 언론에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인노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은 김순호 국장이 경찰에 인노회 주요 정보를 밀고한 뒤 경찰에 입직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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