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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마스크를 벗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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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그림=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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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느낌 있지 않나? 사람들이 나만 보는 느낌.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나만 보는 것 같았다. 불만 가득하게 보다가 쏘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라 답답했다. 그때 방송이 나왔다. “지금 해당 객차에 마스크를 쓰지 않은 분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해당 승객은 신속히 다음 역에서 하차하시기 바랍니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사람들이 나를 험악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어? 마스크가… 없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분’은 나였다. 눈앞이 하얘지면서 기절할 것 같은데, 기절하지는 않았고, 창피하고 또 창피했다.

꿈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는데 꿈 같지 않았다. 너무 생생해서, 그리고 너무 아파서. 안 내리려고 하는 나를 승객들이 객차 밖으로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이 꿈을 여러 번 꾸었다. 마스크가 없어서 쫓겨나거나 봉변이나 멸시를 당하는 꿈을. 마스크를 분명히 하고 나왔는데 마스크가 사라지는 꿈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마스크 꿈’은 되풀이해서 꾸었다. 그리고 이렇게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악몽이라서 그럴 것이다.

현실에서도 마스크가 없어서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다. 온갖 군데를 뒤지며 찾으면 결국 어디선가는 나온다. 재킷 주머니에서 나온 적도 있고, 테이블 아래서 찾은 적도 있다. 마스크를 찾는 그 짧은 시간은 늘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온갖 생각이 들곤 했다. 마스크가 없다면 나는 어쩌지? 마스크가 없이 길을 걸어야 하는데? 마스크를 못 구하면 어쩌지? 지하철을 탈 수도 없고 택시를 탈 수도 없는데. 어떻게 가야 하나?

한동안 나의 공포는 마스크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꿈에서처럼 말이다. 꿈의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이 없고, 개연성도 없다. 마스크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개연성이 없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말이다. 꿈에서처럼 갑자기 마스크가 사라질까 봐 걱정하니 마스크가 사라지는 꿈을 꾸는 것이다. 코를 슬쩍 만지며 마스크가 잘 있나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런 불안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에는 이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코로나가 ‘심각한 병’에서 ‘일상의 병’으로 급수가 하향되면서 그런 것 같다. 코로나가 심각한 병이었을 때 사람들은 날이 서 있었다. 마스크를 한 뒤 얼굴 전체에 투명한 보호대 같은 걸 하고 있는 사람을 봤을 때는 절망감마저 들었다. 이런 게 악몽 아닌가 싶어서. 디스토피아물에 나오는 암울한 미래 세계 속 게토에 숨어 사는 이들의 외양과 비슷해 보였다.

나도 그런 전면 마스크를 해본 적이 있다. 올해 2월, 인사동에서 있었던 한 공연에서였다. 공연장에서 눈에 쓰는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가장무도회에서 쓸 법한 눈동자 부분만 뚫린 마스크였다. 금빛으로 된 마스크를 들고 잠시 설렜다. ‘아이즈 와이드 셧’ 같은 영화에서나 보던 이런 비일상적인 물건을 쓰고 공연을 보는 일이 신선하게 느껴졌기에. 써 보니 생각과 달랐다. 두 개의 마스크가 겹쳐졌던 것이다. 입에 마스크를 한 채로 눈에 또 마스크를 하려니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상면부도 가려지고, 하면부도 가려지고, 얼굴이 미라처럼 거의 가려졌다.

기가 막힌다. 몇 년째 마스크를 하고 다녔으면서도 마스크를 하고 있다는 걸 잊고 금빛 마스크를 쓸 생각에 설렜다니. 그날 보았던 공연의 콘셉트는 ‘가장무도회’라서, 관객에게도 가장무도회에 참석한 느낌이 들게 가면, 즉 마스크를 나눠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마스크를 한 상황에서 또 마스크를 하니 ‘미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 악몽의 일부 같았다. 무서웠다.

내가 요즘 무서운 것은 마스크를 벗지 않는 사람들이다. 나는 지금 실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외에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도 마스크를 쓴다. 이 폭염에 말이다. 실외 마스크가 해제되어서 마스크를 벗는 게 잘못이 아닌데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걸어오면 다시 마스크를 쓴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을 보면 미안해지고 나도 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배려일 수도, 예의일 수도, 조심성일 수도, 미안함일 수 있다. 남이 쓰면 나도 쓴다. 나는 이 상황이 공포스럽고, 피곤하다. 벗을 수 있다고 해도 벗을 수 없는 이 딜레마가, 또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 팬데믹 상황이 말이다. 또 다른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하다. 악몽이 무서운 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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