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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탈세계화’ 되돌릴 수 없는 대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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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계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가 일색이다. 상품과 서비스 무역으로 고도성장을 일군 한국 같은 소규모 개방 경제 국가에 탈세계화는 잠재성장률 훼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꼼꼼히 뜯어보면 탈세계화를 마냥 걸림돌로 볼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작금의 탈세계화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라는 정치 체제 간 충돌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과 기술 패권 등이 얽히고설킨 복잡다단한 양상이 뚜렷하다.

무엇보다 국가의 응축된 기술력이 글로벌 패권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면서 IT 인프라가 탄탄한 한국 같은 국가에는 탈세계화·탈중국화 흐름이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민관 협력 체계 구축을 통해 미중 양 진영 사이에서 섬세한 탈세계화 대응 전략 수립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매경이코노미

▶세계화지수로 본 탈세계화

▷세계화 종언은 섣부른 결론

최근 목격되는 탈세계화는 과거와는 전개 양상에서 차이가 있다. 과거에도 탈세계화 현상은 경제적 위기 국면에서 두드러졌다. 대공황 시기였던 1930년대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가 그랬다. 자국 일자리를 지키려는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가 팽배했던 때다.

다만, 1930년대 탈세계화를 주도했던 세력은 당시 구소련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 진영이었다. 반면, 2010년대 이후 현재까지 진행 중인 탈세계화는 미국과 유럽 등 자유주의 진영에서 촉발된 측면도 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 이후 ‘미국우선주의’ 기조가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유효하며 영국은 ‘브렉시트’로 유럽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상환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010년대 이후 탈세계화는 보호무역주의와 경기 침체라는 경제적 동인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상이한 가치 추구라는 정치적 동인도 작용했다는 점에서 1930년대 세계화와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현재 탈세계화는 이미 되돌리기 힘든 추세가 돼버린 것일까. 흥미로운 점은 관찰되는 지표상으로는 작금의 국제 정치 경제 환경이 탈세계화의 한복판에 들어섰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다만, 1970~1980년대 신자유주의 세력 주도 아래 가파르게 진행됐던 세계화가 최근에는 정체 국면을 지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화 수준을 파악하는 대표적인 지표로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 산하 스위스경제연구소(Swiss Economic Institute)가 발표하는 세계화지수(KOF Index of Globalization)를 꼽을 수 있다. 이 연구소는 정치, 경제, 사회 등 3개 부문에서 23개 변수를 활용해 매년 세계 200여 국가의 글로벌화 지수를 발표한다.

이 지표에 따르면 세계화지수는 1990년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이었던 2007년까지 가파르게 증가하다 2008년을 기점으로 증가 속도가 둔화했다. 지표가 감소, 즉 세계화 추세가 다소 위축됐던 때는 1990년 이후 2015년에 딱 한 번 있었다. 1990년 43.6이었던 KOF지수는 2014년 61.8까지 증가했다가 2015년 61.7로 소폭 감소했다. 이는 세계화의 3개 측면 가운데 경제적 세계화가 다소 퇴보했던 탓이다. 하지만 이때도 정치적 세계화는 오히려 개선됐고 사회적 세계화는 큰 변화가 없었다. 2015년 이후 2019년까지 세계화 지수는 대체로 62선을 중심으로 조금씩 등락 중이기는 해도 추세가 역전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즉, 최근 탈세계화 현상은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 진영이 주도했던 과도한 세계화가 일정 수준 되돌려지는 과정으로 봐야지 세계화 그 자체가 전면 중단됐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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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계화 논란이 들불처럼 확산하면서 일각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진은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이 지난 6월 12일(현지 시간) 제12차 WTO 각료회의 개막식에 자리한 모습. (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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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중심 뉴노멀 형성 과도기

▷경제·안보 구분 불분명…곳곳 충돌

전문가들은 탈세계화를 좁은 의미에서 ‘세계화의 역행’으로 단순히 정의할 게 아니라 보다 세분화해 밑그림을 그릴 것을 조언한다. 즉, 미중 전략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술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다.

실제 ‘역사의 종언’으로 잘 알려진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2020년 이후 시장 중심 자본주의 진영의 미국과 국가 중심 자본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중국이 패권 다툼을 벌이기에 앞서 기술 경쟁력과 ‘표준 전쟁(Standard War)’의 단계를 밟을 것으로 봤다.

탈세계화는 상품과 서비스를 단순 수출하던 유형자산 기반의 세계 질서가 혁신 기술을 중심으로 한 무형자산 기반의 ‘뉴노멀’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과도기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AI(인공지능), 빅데이터, 반도체 등 핵심 기술의 영향력은 경제적 측면에서만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와 구분된다. 이런 디지털 기술은 경제적 사용과 안보적 사용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으므로 주요 국가의 산업이 경제뿐 아니라 안보와 직결되는 경우가 흔하다. 기술 경쟁은 국제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며 기술 개발 방향, 기술 사용과 실현 가능 여부 등을 중심으로 ‘기술 블록화’가 곳곳에서 가시적으로 형성되고 있다.

가령, 미국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화웨이와 중국 최대 반도체 제조사인 SMIC 등 중국의 기술 기업 260곳을 미 상무부의 수출관리규정(EAR·Export Administration Regulations)에 따른 우려거래자 명단(Entity List)에 등재했다. 미국의 첨단 기술과 제품이 중국으로 수출되지 않도록 막은 것이다. 미국의 첨단 기술 접근이 제한된 중국은 막대한 달러를 무기로 글로벌 기술 기업을 전방위적으로 인수합병(M&A)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꿨다.

아산정책연구원은 “ ‘테크노 내셔널리즘(Techno-Nationalism)’이라 명명되는 기술민족주의는 국가 안보, 경제 성장과 사회적 안정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디지털 동맹, 국제 기술 동맹, 새로운 규범에 대한 블록화 등 다양한 현상을 창출하고 있다”며 “이익과 가치가 혼재돼 기술 동맹과 협력 관계가 설정됨에 따라 다양한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며 국제 질서는 디지털 규범(Digital Regulation), 데이터 자본주의(Data Capitalism), 기술권위주의(Techno-Authoritarianism) 등 신기술 관련 다양한 이슈와 함께 재편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양한 영역을 망라하는 신기술 이슈의 미중 진영 간 디커플링은 정치적 선언 수준을 넘어 경제적 실질이 구분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이 전문가 진단이다. 미국 주도 기술 선진국은 새로운 경제 질서와 통상 규범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권역에서 다자간 협의체를 구성 중이다. 미 바이든 행정부가 주도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나 미국-유럽연합 무역기술이사회(TTC) 등의 클럽형 협의체가 이런 예다.

이들 협의체는 전통의 다자간 무역협정과 달리 디지털 경제, 에너지·기후변화 대응, 공급망 안보 구축, 친환경에너지 공동 투자, 공정한 자유무역 환경 조성 등을 망라하는 보다 포괄적인 경제 협력 체제다. 국가 중심 중국 자본주의 체제의 폐쇄성 탓에 중국 디지털 산업이 글로벌 규범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과학 기술과 혁신을 중심으로 한 전략 다툼과 다양한 분야에서의 디커플링은 미중 간 패권 다툼을 더욱 심화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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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계화, 한국엔 기회일 수도

▷민관 협업으로 미중 투트랙 전략

기술 중심 산업 구조 대전환으로 빚어지는 탈세계화를 마냥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노동집약적 산업은 이미 임금과 생산비용이 낮은 동남아 등으로 대거 이전됐지만 기술 기반 산업은 속성이 다르다. 기술 개발에는 고도의 숙련된 인력과 이를 지속적으로 공급할 교육 인프라, 높은 수준의 생산시설과 이를 뒷받침할 자본력 등이 총체적으로 투입되므로 국가 간 헤게모니 전환이 좀처럼 이뤄지기 힘든 구조다. 한국처럼 IT 인프라가 뛰어난 국가에 탈세계화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진단이다.

장지상 전 산업연구원장(경북대 경영학과 교수)은 “지금까지는 일본이 소재를 생산하면 한국이 이를 수입해 중간재를 만들고, 중국이 다시 완성품을 생산하는 등 각국이 각자 맡은 역할을 하며 교역을 했지만 이런 밸류체인의 모습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며 “탈세계화를 극복하려면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는 것만이 최고라는 관점을 바꿔야 하며 제품 기획이나 신제품 개발, 마케팅, 공장 관리 등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를 적극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청장을 역임한 주영섭 한국디지털혁신협회 회장(고려대 특임교수)은 “스마트 제조 혁신을 고도화하고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해야 함은 물론, MZ세대를 맞이하기 위해 기업 문화를 바꾸는 등 인적 투자를 늘리고 글로벌화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고 보탰다.

특히 탈세계화 흐름 속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위기와 기회가 공존한다. 기회의 효용을 극대화하려면 민관 협업 체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기술 역량과 인프라가 뛰어난 한국은 미국·유럽 주도의 공급망 네트워크와 중국 주도 공급망 네트워크에 모두 참여하는 투트랙 전략을 노릴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미중 양 진영을 상호 자극하지 않는 가운데 국익을 챙기는 철저한 실용 외교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산업연구원은 최근 펴낸 ‘IPEF의 주요 내용과 우리의 역할’이라는 보고서에서 IPEF 참여와 관련, 전략적 차원에서 득실을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산업연구원은 “IPEF의 일부 필라들 중 청정에너지 개발·인프라 격차 해소를 위한 투자 참여는 우리 기업들에 새로운 경제적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일부 아젠다는 중국과의 협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전략적 대응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며 “공급망 재구축·안정화와 관련해 IPEF 참여국들의 완전한 탈중국화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미국 내에서도 대중국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로 하여금 IPEF 참여가 중국을 경제적으로 배제하는 것처럼 비춰지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정리했다.

[배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6호 (2022.07.06~2022.07.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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