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신숙주와 아빠 찬스 [전형일의 사주이야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편집자주

‘4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 말은 사주팔자에서 연유됐다. 생활 속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말과 행동, 관습들을 명리학 관점에서 재미있게 풀어본다.

한국일보

신숙주 초상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네 차례 공신(功臣) 반열에 오르고 영의정을 8년이나 지낸 신숙주(申叔舟)도 자식에게 '아빠 찬스'를 사용했다. 신숙주의 여덟 아들 중 넷째인 신정(申瀞)은 아버지 덕분에 음관(蔭官)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해 20대 후반에 재상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들과 고위 관직에 있는 자식들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가 음서제(蔭敍制)다. 음서제는 신라 때부터 시작됐으나 고려 때 제도로 확립돼 조선 왕조까지 이어졌다. 고려의 음서제는 왕족의 후예와 공신의 후손 및 5품 이상 고관의 자손을 대상으로 하는 등 크게 세 종류가 있었다. 음서는 아들, 사위, 손자, 외손자까지 일가족을 모두 관직에 오르게 할 수 있는 제도였다. 기록에 의하면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음서를 통해서 관리가 된 사례도 있었다. 고려시대 문벌귀족이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음서제 덕분이었다.

음서 출신자들은 가문의 능력 정도에 따라 처음부터 유리한 조건에서 벼슬을 시작했다. 대략 15세를 전후하여 관직에 임하는 등 조기 진출했으며 한직제(閑職制)와 같은 제약은 없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개혁가였던 정도전도 "장상(將相)과 대신(大臣)은 백성에게 공덕이 있고, 그 자손들은 가훈을 이어받아 예의를 잘 알아 벼슬을 할 만하다고 생각해 문음제(門蔭制)를 두었다"고 음서제를 인정했다. ('조선경국대전')

개인 능력이 아닌 가문의 능력으로 관리를 뽑는 병폐는 당시에도 문제가 많았다. 때문에 조선시대에서는 음서제도를 통해 기용된 관리를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도록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 과거를 치르지 않고 등용된 음관을 기록한 음보(蔭譜)에 1,235명이 기록된 걸 보면 '아빠 찬스'로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음서제는 신분제 사회에서 상류층의 사람들이 지위를 자손 대대로 계승하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관직을 세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악습(惡習)이 민주주의에서도 부모의 부(富)와 사회적 지위가 대물림되는 '현대판 음서제'로 부활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불공정 중심에는 잘못된 '아빠 찬스'가 있다. 능력과 무관하게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라는 말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이 같은 기회의 차별은 주로 사회 지도층들이 앞장서고 있으며, 법을 집행하는 법무부 장관들도 예외가 아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자녀의 입시 비리로 재판을 받고 있으며, 한동훈 현 법무부 장관은 자녀와 처조카들에게 제기된 '편법 스펙 쌓기' 의혹에 대해서 조사를 받고 있다. 2010년에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이 외교부 5급 공무원에 특별채용되는 비리가 밝혀져 유 장관이 사퇴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이 같은 사례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풍부하다.

반칙과 특권을 일삼는 일부와는 달리 시중에는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무관심 그리고 엄마의 정보력'이 자식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는 그저 잠자코 있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의미다.

실제로 명리학(命理學)에서도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의 역할은 단순하다. 사주(四柱)에서 남녀 구분 없이 자식에게 아버지는 재물(財)에 해당한다.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는 사주의 주체인 일간(日干, 생일 위 글자)이 상극(相剋)하는 오행(木火土金水)이다. 일간이 목(木)일 경우 토(土, 木剋土)가 재물이며,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육친법(六親法)에서 자식에게 아버지를 뜻한다. 따라서 아버지는 자식에게 그저 경제적 지원만 하면 되는 존재다. 이것이 명리학에서 말하는 순리(順理)다.

자식들이 경제적 지원 외에 '아빠 찬스'가 필요한 것은 스스로 '홀로서기'가 힘들다는 반증이다. 아버지의 후광과 도움 없이는 생존과 경쟁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깜'은 안 되지만 부친의 위세로 승승장구하던 신정은 나중에 성종의 옥새를 위조해 남의 재산을 탈취한 사건으로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물론 신숙주가 사망한 이후의 일이다. ('치명적 말실수')

결국 '아빠 찬스'는 그 힘이 사라지면 그 자식은 실체가 드러나고 냉정한 평가를 받게 된다.

한국일보

전형일 명리학자·철학박사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