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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오래 살고 싶다는, 밝힐 수 없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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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탑건: 매버릭>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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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 | 문화부 기자

<탑건: 매버릭>이 5060에게 ‘가슴이 웅장해지는’ 관람 체험을 제공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운 좋게 상위 1% 승승장구 열차에 탑승하지 않는 한 이제 조직에서든 어디서든 한구석에서 눈칫밥이나 과식하지 않고 버티면 다행인 시절에 도착한 줄 알았는데 나이 환갑에 전투기 몰고 온 ‘오빠’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극 중에서 30년 전 경쟁하던 동료는 커리어의 정점에 올랐다가 말 그대로 인생의 황혼을 보내지만 만년 부장 우리 오빠는 팔팔한 후배들도 수행하지 못한 임무를 거뜬히 해낸다. 스토리는 고난도 전투기 조종 연기를 직접 했다는 톰 크루즈의 ‘노익장 투혼’과도 포개진다. 극장에서 옆좌석 20대들이 ‘왜 저래?’ 레이저를 쏘아대도 우리는 눈물 콧물 쏟아내며 물개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불과 15년 전에 ‘30대 여성 배우들, 엄마 말고 맡을 배역 없어’ 이런 내용의 기사를 썼는데 지금 주인공이 아닌 전도연이나 김혜수는 상상할 수 없다. 톰 크루즈는 마블 어벤저스와 일당백으로 싸운다.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아서 ‘도대체 언제까지 해먹을 참인가’ 비난받는 중장년도 있지만 냉정한 대중의 선택을 받는 중장년 엔터테이너들이 늘고 있는 건 어떤 안도감을 준다. 같이 늙어가는 나도 여전히 ‘쓸모 있는 존재’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느낌이랄까.

환갑의 톰 크루즈가 날아다니는 <탑건: 매버릭>과 대척점에서 최근 시선을 끈 다른 영화가 있다. 개봉 전이라 아직 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일본 영화 <플랜75>다. 관련 기사를 보면,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일본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정부가 75살을 넘긴 이들에게 안락사를 권유하고 신청을 받아 이를 시행해준다는 이야기다. 비록 픽션이지만 섬뜩한 아이디어가 칸에서도 화제가 됐다는데 내가 진짜 섬뜩했던 것은 이런 설정이 아니라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영상광고에 등장해 “원하는 때에 죽을 수 있어서 너무나 만족스럽다”고 말하는 플랜75 선택자의 말이다.

설정을 지우고 이 멘트만 본다면 이거야말로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게 아닌가. 지금도 틈만 나면 치매나 각종 노환으로 고통받는 부모나 지인 부모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로 인해 고통받는 나 또는 친구의 이야기를 하는 게 우리 세대 대화의 절반이다. 그리고 대화는 “나는 그때까지 살지 말아야 할 텐데, 오래 사는 것도 못할 짓이야”로 마무리된다. 나 역시 병마에 시달리면서 긴긴 생을 이어가느니 죽는 게 낫다고, 우리도 존엄사를 넘어 안락사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기껏해야 서너명이 전부인 친구들 앞에서 목청을 높이곤 했다.

이와 관련해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이 칼럼에서 종종 소환하는 미드 <그레이스 앤 프랭키> 시즌2의 한 에피소드다. 두 주인공의 오랜 친구인 말기 암 환자 베이브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러 성대한 파티를 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뒤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 중 많은 이가 이 에피소드를 최고로 꼽기도 한다. 나 역시 이런 죽음, 온전한 정신이 남아 있고 육체적으로도 무너지지 않았을 때 제대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또 드는 거다. 그래도 죽기 전에 저런 파티 몇번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파티까지는 아니더라도 친구들하고 좀 더 놀 수 있지 않을까? 술 한두잔 더 마실 수 있지 않을까? 바삭한 감자튀김이라도? 나 진짜 멋지게 죽고 싶은 거 맞아?

나이 들며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는 건 맞겠지만 멋진 마무리가 멀쩡할 때 죽어야 하는 것이어야만 할까. 정신이 온전치 못하거나 기저귀를 차고 누워 있는 삶은 정말 죽음보다 못한 것일까?

일본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에서 묻는다. “‘존엄한 생’과 ‘존엄하지 않은 생’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이에 대한 영화 <플랜75>가 내놓는 영화적(비판적) 답변은, 그리고 우리 대부분의 머릿속에 각인된 답변은 ‘쓸모 있는 존재, 즉 생산성을 가진 존재로서 가치를 유지할 때까지’다. 삶의 방식이 생산에서 비용으로 바뀌는 순간, 즉 병들고 아프게 되면 역겹고 부정적인 존재가, 그리하여 존엄성도 사라지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영화에서 노인들이 ‘플랜75’를 선택하는 이유는 ‘여한 없이 살아서’ ‘살 만큼 살아서’가 아니라 ‘자식이나 주변에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친구들한테 “구질구질하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고 싶다는 거냐?”고 비난을 받을 것 같다. 부끄럽지만 친구들아, 그래. 장수지옥이라는 이 세상에서 사실은 나, 오래 살고 싶어. 자세한 이유는 다음에 이야기해줄게.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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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75>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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