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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글로벌포커스] 길 잃은 문명충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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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중동' 하면 종교분쟁, 극단주의, 테러를 떠올린다. 이러한 혼란의 뿌리에 이슬람이 있다는 주장도 따라온다. '문명충돌론'의 저자 새뮤얼 헌팅턴은 보편적인 규범에서 벗어난 이슬람 문명 때문에 세계적 혼란마저 생길 수 있다고 경고한다. 헌팅턴은 문명이란 이념의 대결에서 살아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만큼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런데 서구 문명권이 오만한 착각에 빠져 다른 문명권에 자유주의, 대의제, 법치, 다원주의 등의 보편가치를 강조하면서 갈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문명충돌론에서 이슬람 문명권은 서구 문명이 발전시킨 보편가치에 거부감을 보이면서 폭력을 미화하는 자신의 문화에 기반해 거대한 단일 이슬람 공동체의 건설을 추구한다. 중국 문명권 역시 서구식 보편주의를 거부하고 막강해진 경제력을 앞세워 중화주의로 뭉친다고 진단한다. 최악은 이슬람과 중국 문명권이 힘을 모아 서구 문명권이 이끄는 세계 질서에 대항해 지구 평화가 흔들릴 경우라고도 했다.

9·11테러의 발발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오랜 전쟁을 치른 미국이 최근 중국 견제를 위해 미·중 경쟁을 주도하자 문명충돌론의 선견지명에 무릎을 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중동에서 분다는 친중 바람 소식에 여기저기서 헌팅턴의 혜안이 재소환되기도 한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문명충돌론을 가리켜 중동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오묘하다고 우기는 서구의 독단적인 잣대이자 서구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산물이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오리엔트의 혼란은 영불 제국주의에 이은 미국 패권주의, 이와 결탁한 유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말한다. 사이드의 단순하고 과장된 주장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문명충돌론의 허점은 현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슬람 문명권은 중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 가장 많은 나라는 인도네시아, 인도 순이며 이들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은 세계 기준에서 평균 이상이다. 같은 문명권 내 나라들은 똘똘 뭉친다는 헌팅턴의 주장과 달리 최근 중동 이슬람 세계의 핵심 갈등은 이슬람 문명권 내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이다. 심지어 수니파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 이스라엘이 시아파 이란에 맞서고자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전략적 연대를 조직했다. 아브라함 연대의 대표주자 UAE에서는 유대교 커뮤니티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대규모의 힌두교 사원이 한창 건설 중이다. 또한 무슬림이 외부에서 주입하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거부감을 보이고는 있지만 동시에 많은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손으로 지도자를 직접 뽑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문명충돌론의 약점은 한국인의 뚜렷한 반중 정서에서도 발견된다. 문명충돌론에서 우리는 중국 문명권에 속하며 유교 문화의 우산 아래 중국과 종속 및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잘 지낸다. 실제는 꽤 다르다. 올 3월 아산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은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6.85점, 시진핑 주석에게 1.99점의 호감도를 보였다(5점 중립). 한미동맹의 역할에 민주주의와 인권 등 보편가치를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60.2%였다. 올해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인의 대미 호감도는 89%, 대중 호감도는 19%로 나타났고 한국의 대미와 대중 호감도 격차가 19개 조사대상국 가운데 가장 컸다. 우리의 반중 감정은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 보복과 숱한 문화 왜곡 등으로 더 커졌다.

우리의 반중 정서를 아랍 걸프국과 이스라엘의 동료들에게 알려주니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희는 중국의 팽창주의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하니 우리는 이란의 위협을 잘 이해 못하더라는 답이 돌아왔다. 외부자는 내부의 사정을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국제 정세는 문명이 아닌 이해관계의 충돌로 요동친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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