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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문인화'라 불러도 좋을 어반스케치 [서울을 그리는 어반스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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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스케쳐를 펜앤드워시 기법으로 그리다

어반스케치로 도시와 사람을 그리면서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생각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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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곡1904의 카페 FIILLTHE BLANK에서 그림에 열중한 스케쳐들. 그림에 열중한 스케쳐들이 아름답다. ⓒ 오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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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능곡역은 그냥 지나치는 역이라는 느낌이다. 능곡역의 서울 쪽 행신역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고 KTX 종점이 있다. 일산 쪽 대곡역은 경의선과 3호선 환승역이 있어 항상 분주하다. 그에 반해 능곡역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다고나 할까.

하지만 어반스케쳐스고양 7월 모임에서는 능곡역이 주인공이다. '능곡'(陵谷)은 원래 이름이 '능골'이었는데 왕릉 후보지로 여러 번 거론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능곡역은 1908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유서 깊은 역인데 현재 역은 전철 개통을 맞아 다시 지은 역사로, 옛 역사에서 200여미터 떨어져 있다. 1978년에 건설된 구역사는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토당토당 능곡마을 프로젝트 사업에 포함되어 2021년에 '능곡1904'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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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곡1904전경 ▲ 1978년에 지어진 역사를 2021년에 복원하여 문화 사랑방으로 사용된다. ⓒ 오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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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도 장맛비가 쏟아지더니 이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능곡역 플랫폼에 발을 딛자마자 숨이 막힌다. 능곡역은 역 주변에 옛 건물들이 아직 남아 있고 능곡시장이 전통을 이어서 성업 중이다. 능곡 일부 지역은 재개발이 완료되었고, 일부 지역은 재개발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 원래 그리려고 한 능곡시장 전경은 포기하고 능곡1904로 향했다. 그곳에는 'FILL THE BLANK'(필 더 블랭크, '빈칸을 채우시오'라는 뜻)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우리 스케쳐들은 늘 빈 스케치북을 채우는 사람들이니 우리에게 딱 맞는 이름이다. 더위를 피해온 고양의 스케쳐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림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더 중요하니깐.

서울에서 온 스케쳐 한 분을 만났다. 모든 모임에 늘 빠지지 않고 열심히 그리시는 분인데, 특히 그의 그림은 색이 참 곱다. 어떤 일을 하시기에 이렇게 열심히 그리시나 하고 직업을 물어봤다. 그분이 하는 일은 자동차 충돌 테스트를 관리하는 엔지니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어반스케쳐들의 직업이 참 다양하다. 옆에서 그림을 그리시는 스케쳐도 항공사에서 수십 년간 근무하신 분이고, 목사님도 오셨고, 선생님들도, 주부도 많다.

아무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직업을 가지신 분들이 그림이라는 공통 관심을 갖고 모이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 그림에 매진하는 것을 보면, 나는 어반스케치가 현대판 문인화라는 생각이 든다.

문인화(文人畵)란 전문적인 화가가 아닌 사대부들의 그림으로, 취미나 여가를 활용할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중국 북송시대 소식(蘇軾)과 그의 친구들은 신분과 학문이 우월한 사대부의 그림은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공(畵工)의 그림과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인(士人)의 그림을 보는 것은 마치 천하에 뛰어난 말을 고르는 것과 같다. 즉 그 기상이 어떠한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공의 그림은 주로 채찍이나 털가죽 그리고 구유나 여물과 같은 부수적인 것만 취하여 그림에서 준수함을 찾을 수가 없다. - 소식 (蘇軾) <동파제발(東坡題跋)> 권5

그는 더 나아가 사인(士人) 즉 문인의 그림은 화공의 그림보다 더 뛰어나며 문인화야말로 진정한 그림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문인화는 기교나 구체적 묘사에 매몰되지 않고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때부터 문인화 전통이 시작되어, 조선시대의 작가들이 문인화를 많이 그렸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에서 조선 문인화의 절정을 이룬다.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2021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한국 배우는 물론 아시아 배우로서도 첫 수상이다.

그녀는 수상 소감에서 "모든 상이 의미 있지만 이번엔 특히 고상한 체한다고(snobbish) 알려진 영국인들에게 좋은 배우로 인정받아서 정말 기쁘고 영광입니다"라고 말해 좌중의 웃음과 박수를 받았다.

문인화라는 단어 자체가 화공을 은근히 낮추는 말이니, 나는 문인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고상한 체한다(snobbish)'는 저 단어가 생각난다. 'Snobbish'는 우리말로 번역해 놓으면 상당히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저 말을 들은 영국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한 것을 보면 그렇게 부정적 함의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문인화라는 이름이 좀 고상한 체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문인화가 우리 문화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가. 특히 그림을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문화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는 점과 조선시대 이데올로기를 주도하는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그림이라고 선언했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문인화와 어반스케치가 비슷한 점을 간략히 살펴보면,

첫째, 문인화도 어반스케치도 그림을 직업적으로 그리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는 그림이다. 문인화란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의 그림이라는 뜻이고, 어반스케치를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 어찌 보면 문인화나 어반스케치나 그리는 사람의 직업적 장점을 살려서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둘째는 기교나 세밀한 묘사보다는 그리려는 대상의 본질에 더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직업적 화가가 장시간 그린 그림에 비해 떨어지는 세밀한 묘사를 직관적인 표현으로 대신한다.

셋째, 문인화는 주로 수묵담채로 그리는데(수묵담채란 먹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엷은 채색을 하는 그림을 말한다), 간략하지만 사물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문인화의 멋이다.

어반스케치는 펜앤드워시(penandwash)로 그리는 경우가 가장 많다. 수채화는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수채 물감으로 채색한다. 펜앤드워시는 펜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가볍게 채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펜담채(淡彩)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옛날 문인화 화가들이 자신들이 늘 다루었던 붓으로 그림을 그렸듯이, 글씨를 쓰던 펜으로 그림을 그리니까 수채화보다는 펜앤드워시가 훨씬 배우기 쉽다. 물론 잘 그리기는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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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곡1094. 너무 더워서 실내에서 그렸다. 펜으로 그리고 수채 물감으로 간략하게 그렸다. ⓒ 오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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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FILL THE BLANK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는 스케쳐 두 분을 그렸다. 그림에 열중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아름답다. 나는 보통 만년필로 많이 그리는데 오늘은 세밀한 인물 묘사를 위해 볼펜으로 그리고 수채물감과 마카로 마무리했다. 펜앤드워시 그림이다.

옛날의 문인화 화가들이 오셔서 요즘 그림을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내 생각에는 다른 그림보다는 펜앤드워시로 그린 어반스케치에 가장 동질감을 많이 느끼고 좋아하실 것 같다.

오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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