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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오은영의 화해] 나 몰래 남동생만 집 사준 부모님...속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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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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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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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결혼해서 독립한 30대 장녀입니다. 부모님이 결혼한 남동생에게 저만 모르게 집을 사주신 것을 알게 돼 너무 속상합니다.

사실 저는 나름 화목한 4인 가정에서 자랐어요. 부모님과 남동생 한 명이 있습니다. 저와 부모님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어요. 다만 동생이랑 싸우거나 의견충돌이 있을 때면 부모님이 "누나니까 참아야지"라며 강제 사과를 시킨 적도 많았어요.

언젠가는 동생이 거짓말을 한 것을 알게 돼 부모님에게 말한 적이 있었죠. 동생은 그 사실을 부인했어요. 결국 동생이 거짓말을 한 사실이 확인됐지만 정작 부모님은 동생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가 괜히 문제를 삼아 일을 크게 만들었다는 뉘앙스를 풍겼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뭐든 스스로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동생만 챙기니 내 일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결혼을 해서 집을 나오게 됐습니다. 당시 집을 따로 구하지 않고 시댁 소유의 아파트에서 살기로 했죠. 당사자인 저는 아파트에 불만이 없었지만 부모님은 그 후로도 자주 "집이 낡았으니 시댁에 다른 집을 구해달라고 하라"고 말했죠. 심지어 남편에게도 "우리 딸은 연봉도 높고 맞벌이니 엄청난 혼수를 한 것이다"라며 당당하게 시댁의 지원을 요구했습니다. 그 기억은 남편에게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는 듯합니다.

그러다 남동생이 결혼하면서 일이 터졌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동생이 신혼집으로 반전세 집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죠. 전세금은 예비 올케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전세금과 동생이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합해 3억 원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올케가 오피스텔을 비워주기도 전에 동생이 이미 신혼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궁금했습니다. 오피스텔에서 나오기도 전에 돈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부모님과 동생에게 물었지만 누구도 명확히 대답해주지 않았죠.

그러다 우연히 한 친척으로부터 부모님이 동생에게 집을 증영했다는 사실을 듣게 됐습니다. 기분이 상했습니다. "나한테는 말 한마디 없이 동생에게 이미 집을 증여해주고, 그 월세로 신혼집의 월세도 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서운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제 감정을 그날 부모님께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은 "내 돈을 내가 마음대로 썼는데 왜 간섭이냐"며 제게 오히려 화를 내더군요. "돈을 밝힌다" "따지고 든다"는 비난도 함께요.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부모님이 자동차를 구입했습니다. 우연히, 차를 동생이 매일 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저는 부모님을 향해 동생에게 차를 사준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솔직하게 설명해줄 것을 기대했는데 "명의가 내 것이니 사준 것이 아니다. 따지고 들지 마라"는 신경질적인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동생에게도 물었지만 설명은커녕 "기분이 나쁘니 앞으로 가족모임에 나오지 않겠다"는 엄포만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부모님의 지원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제가 모르게 동생만 지원해준 것은 상처로 남아 두고두고 서운합니다. 저에겐 숨기기 급급하고, 어쩌다 알게 돼 물어보면 오히려 저를 '욕심이 많다' '까다롭다'고 비난하는 가족들에게 너무 화가 납니다. 저의 억울한 마음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과는커녕 갈등만 커지는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유진(가명·34·직장인)
한국일보

유진씨가 사연을 보낸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요. 지금부터 유진씨의 마음과 생각을 살피면서 마음의 여행을 같이 해보려고 합니다. 사연을 읽고 '참 억울했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나름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님이 애써서 키워주시고 공부시켜 주셨는데 억울할 일이 뭐가 있냐고 반문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부모님이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쓰든 자식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권리는 없지요. 그러나 유진씨가 서운해 하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니겠죠. 가족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이 서운하고 섭섭한 것이지요.

상황만 보면 유진씨가 처한 문제가 부모가 아들과 딸을 차별해서 비롯됐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은 성별을 불문한 모든 형제 자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비교적 흔한 문제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부모님이 딸을 차별하고 아들을 선호한 것으로 돌려버리면 유진씨 내면의 상처를 깊이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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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씨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부모님이 나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섭섭함이 존재하고 있어요. 유진씨에게는 '내'가 부모에게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자식이라는 신뢰가 없는 것 같아요.

대부분 부모는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지요. 이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부모도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를 비교하기도 하고 감정조절을 못하기도 합니다. 특히 부모가 자식에게 양육과정에서 조심해야 하는 행동 중 하나가 '비교'입니다. 비교를 당하는 아이는 내가 우주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되죠. 그건 그 자체로 자녀에게 타격이 됩니다. 아마도 유진씨의 부모님도 당연히 유진씨를 사랑하셨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을 편애해왔던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설사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유진씨는 그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편애도 누군가는 사랑을 덜 받는 것이기에 비교대상이 되는 의미가 있지요.

유진씨에게는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데 대한 불만도 있는 것 같아요. 자녀의 생각과 행동이 언제나 옳고 맞는 것은 아니지요. '오냐오냐' 비위를 맞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자녀의 생각과 감정이 타당한 부분이 있다면 그 타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의 감정과 생각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억울한 마음이 생기죠. 부모님과 동생이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고 협동과 협조를 바랐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텐데 그걸 숨기는 것 자체가 유진씨에겐 큰 상처가 됐을 거예요.

실은 유진씨 부모님과 같은 부모들을 많이 봅니다. 자녀들이 사이좋게 오손도손 살길 바라면서 정작 자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죠. 또 어떤 문제를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몰래 넘어가려고 합니다. 나중에 문제가 명확하게 밝혀지게 되면 난처할 수밖에 없죠. 그런 상황이 와도 자녀가 무엇 때문에 속상하고 억울한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사자에겐 같은 상처가 반복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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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씨는 부모님 성향과 달리 의견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뭐든 짚고 넘어가는 성격이에요. 부모님은 그런 유진씨의 기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미처 파악하지 못하면 그 부분으로 인해 잘못된 피드백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진씨도 성장하면서 그런 이유로 부모님으로부터 부정적 피드백을 받았을 수 있어요. 남들에게 인정받는데 정작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서운하고 억울하겠어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유진씨에게는 관계에 매듭을 지으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매듭을 짓는 건 부모님과 의절을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를 테면 새로운 창 앞에 서는 일과 같아요. 부모는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창인데 그 창이 항상 완벽한 건 아닙니다. 찬바람이 마구 들어오는 틈이 있기도 하고 바람이 세게 불면 창이 떨어져 내가 다치기도 해요. 부실한 창 앞에 계속 서 있으면 바람이 불 때마다 불안하고 아플 수밖에요. 어린 시절 부모님과 경험했던 그 창 앞에 계속 서 있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의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만 이런 면에서 나를 좀 억울하게 하고 속상하게도 했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하세요. 그리고 새 창 앞으로 자리를 옮겨 내 자신에게 "삶을 스스로 창조해가는 방향으로 갈 거다"라고 따뜻하게 말해주세요.

그렇더라도 부모님은 똑같은 말을 할 거고 상처받고 힘든 그 상황은 여전히 변하지 않을 거예요. 달라지는 건 나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부모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기 위한 게 아닙니다. 내가 상황을 스스로 컨트롤하면서 관계에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찾기 위해서죠.

유진씨는 그동안 상당히 멋진 인생을 살아왔을 겁니다. 당신은 내면에 굉장한 힘이 있고 그 힘이 결국은 당신을 지금보다 훨씬 좋은 쪽으로 이끌고 갈 거예요. 스스로 더 행복하고 좋은 쪽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바로 그 힘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당부를 건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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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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