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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스킨헤드에 닥터마틴 신은 백인 남성, 그는 중국인을 위해 야간 순찰을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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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기자(kakiru@pressian.com)]
"이 모든 것은 아저씨 때문이야."

최근 영국에서 화제가 된 게 있다. '베이비붐 세대 책임론'이다. 영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6년~1964년에 태어난 사람들로 영국이 경제적으로 번영한 시대에 자랐다. 이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 브렉시트 이후에 극대화됐다.

이 투표에서 베이비붐 세대는 탈퇴를, 젊은 세대들(밀레니얼 세대)은 EU 잔류를 지지했는데, 투표 결과 탈퇴가 결정되자 젊은 세대들이 베이비붐 세대에게 책임을 물었다. 무상교육과 막대한 연금, 베이비붐 세대는 영국에서 가장 풍족한 삶을 영유했다고 한다. 그들을 향한 젊은이들의 비판은 거셌다. 젊은 세대는 이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망쳤다고 분노했고, 베이비붐 세대는 진짜 영국의 미래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젊은 세대는 모른다고 으르렁거렸다.

"당신들은 좋은 시절을 살아서 목소리가 큰 세대야."

"너희는 패기도 없고 의욕도 없는 세대지."

사탄 취급 받는 '아저씨', 그저 한 명의 사람일 뿐

나이가 들면 보수화된다는 말이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보수적으로 바뀌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분명한 건 나이를 먹어가며 쌓이는 인생 경험이 그 사람의 '성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세대마다 적용되는 다른 역사적 경험이 그 사람의 '성향' 결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보통 '세대론'은 손쉽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영국에서 중장년의 백인 노동 계급 남성들(베이비붐 세대). 최근 이들에 대한 인식은 여성과 이민자를 차별하고, 세금을 축내고 청년 일자리를 빼앗는 이미지가 됐다. 한때 축구, 음악과 펍(PUP) 등 영국 대중문화를 이끌어온 이들이었으나, 지금은 EU 탈퇴에 찬성표를 던지며 '자신만 생각하는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계급투쟁>(사계절 펴냄)으로 잘 알려진 작가 브래디 미카코는 최근 펴낸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사계절 펴냄)에서 이들을 그렇게 바라보는 게 맞는지 의문을 던진다. 1996년 영국으로 건너간 일본 출신 저자는 그곳에 이웃 또는 친구로 가깝게 지내는 50~60대 베이비붐 세대, 그중에서도 남성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사탄 취급을 받는 이 '아저씨'들도 그저 한 명의 평범한 시민이고 다른 이들과 비슷한 인간이라고 설명한다.

일례로 마트에서 일하는 스티브 씨. 그는 스킨헤드에 스키니 진을 입고 닥터마틴 부츠를 신는다. 외모만 놓고 보면, 극우 인종주의자처럼 보인다. 실제 성향도 어느 정도 그렇다. 이주민들이 영국을 떠나야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그는 브렉시트 찬성파다. 하지만 다른 면도 있다. 그는 동네 10대들이 자기 지역에 사는 중국인들을 괴롭히자 야간 순찰대를 조직해 그들을 보호한다. 이러한 행동에는 이주노동자가 더는 들어와서는 안 되지만, 이미 들어온 이들은 보호받고 체제 내에서 존중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내재해 있다.

프레시안

▲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책 표지.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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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

스티브에겐 사정이 있다. 보수당의 긴축 재정으로 공공 서비스가 삭감되면서 '우리끼리'라도 서로 도와야 한다는 일종의 '빈민가 공동체 의식'이 그에게 작용한다고 볼 수도 있다. 정부가 빈민가의 치안을 방치하면 스스로라도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행동이다. 

작가는 스티브라는 인물을 통해 베이비붐 세대의 다층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일례로 스티브는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책 읽는 게 인생의 낙인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날벼락처럼 어느날 도서관이 폐쇄됐다. 긴축 재정의 여파였다. 이후 어린이 놀이방 한구석에 책 상자만 남게 됐고, 그곳이 도서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스티브는 그곳을 지키고 앉아 꿋꿋하게 시의 도서 배송 서비스를 이용한다.

저자는 키가 꺽다리처럼 크고 빡빡머리에 매서운 눈빛을 한 아저씨가 스키니 진을 입고 닥터 마틴 부츠를 신은 채 어린이 놀이방 한구석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것이야말로 긴축 재정에 항거하는 민중의 모습'이라고 본다. 생각의 전환이다. 한 '인간'의 삶을 알면 그를 쉽게 재단할 수 없다.  

그렇게 싸우는 와중에서도 스티브는 놀이방을 방문한 아이들과 엄마들이 찾는 책의 대출 업무도 돕는 친밀감도 선보인다. 긴축 재정으로 놀이방과 도서관을 통합하면서 담당 업무자가 한 명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과 엄마를 챙기고, 중국인들을 보호하면서, 또 스스로는 지역의 도서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티브를 보면, 그를 단순히 EU 탈퇴를 주장하는 꼴통 보수 '아저씨'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책에는 기존 베이비붐 세대들의 이미지를 깨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베트남 여성을 영국으로 불러 11개월 동안 병시중을 들게 하고 세상을 떠난 '아저씨' 대니는 정작 죽을 때는 다운증후군 조카에게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남겼다. 열렬한 보수당 지지자인 '꼰대' 성소수자 테리는 꼬마 아이가 선물한 모자를 죽는 날까지도 자신의 침실에 놓고 좋아했다.

영국에서 살아가는 베이비붐 세대의 이면, 내지는 다양한 군상을 보여주는 저자는 누구의 삶 하나도 단순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연금을 받고 편히 사는 퇴직자, 펍(PUP)에서 맥주를 마시고 주먹을 시도때도 없이 휘두르는 백인 노동자, 이주민과 노숙자를 혐오하는 극보수주의자 등 단편적인 모습들은 이 책에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으니 우리 모두는 친구다

저자는 베이비붐 세대를 단순히 한 덩어리로 볼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 토대 위에서 영국 사회 내 세대 갈등, 노동 계급에 대한 혐오, 브렉시트 찬반을 둘러싼 대립이 극심해진 이유를 고민한다. 저자는 특정 그룹, 즉 베이비붐 세대를 비난하는 지금의 분위기는 사회 전체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처 정부 이래로 보수당 정권이 강화해온 긴축 재정의 결과가 지금의 분열과 갈등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 계급에 '백인'을 붙이거나 그것을 문화적 계층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가난한 계급의 분열을 조장해 서로 싸움을 붙여두면, 정권과 정치인들 쪽으로 분노를 돌리지 않으리라 생각한 위정자들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은 예전부터 'DIVIDE & RULE(분할과 통치)'로 불러왔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은퇴에 접어든 베이비붐 세대(1955년~1974년생)와 밀레니얼 세대 간 갈등은 영국과 다르지 않다. 한국의 경제 성장기에 함께 성장해온 베이비붐 세대와 어느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지금의 청년 세대 간 갈등은 이미 인계점을 넘어선 듯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도 떠오른다. '베이비부머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세대라고 하지만, 이 역시도 일부 아닌가'. 베이비붐 세대 내에도 빈부의 격차는 상당하다. 베이비붐 세대 내 1%가 이 세대 전체 자산의 12%를 차지할 만큼 소수가 부를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자산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는 노후비용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들 세대 대부분이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자가 비율은 59.6% 정도다. 그렇기에 베이비붐 세대들의 상당수 중 주된 노후준비 방법은 국민연금(47.2%)이라는 답변이 나온다.

단순히 어느 세대가 잘 산다는 식의 이분법은 우리가 사는 복잡다단한 사회를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는 정작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기보다는 다른 세대를 향한 적의와 분노만 높이게 된다.

저자는 이제 그러지 말고 노동 계급끼리의 'UNITE & FIGHT(연대와 투쟁)'를 하자고 독려한다.

"노동 계급의 세력이 약해진 현대에 바람직한 노동 계급의 모습이란 다양한 인종, 젠더, 성적 취향, 종교 생활습관과 문화를 가진, 그럼에도 '돈과 고용'이라는 하나의 점에서 이어지는 집단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아저씨 때문이야"라는 질타를 "살아있으니 우리 모두는 친구다"라는 독려로 치환하자고 작가는 말한다. 이는 비단 영국에 사는 사람들, 노동계급에 놓인 노동자에 국한해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프레시안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 포스터. 사회 서비스 비용 삭감, 공공 부문 긴축 등으로 상징되는 보수당 대처 시대를 다룬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스킨 헤드족'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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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기자(kakiru@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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