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중동 석유부자들 거액 베팅… 스포츠 시장 판도 흔들다 [뉴스 인사이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오일머니 앞세운 ‘쩐의 전쟁’

사우디 국부펀드 후원 받는 ‘LIV 골프’

600조원 자산규모 바탕 역대급 돈잔치

슈퍼컵 축구·레이싱대회 유치 하기도

스포츠 산업 통해 국가 홍보 도구 활용

석유 의존 탈피 산업구조 다변화 노려

“국제사회 겨냥 이미지 세탁용” 비판도

세계일보

지난 6월 영국 런던 근교 센추리온클럽에서 열린 LIV 골프 인비테이셔널 개막전에서 한 골퍼가 갤러리들 앞에서 티샷을 날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린 더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2022시즌 프로골프 세 번째 메이저대회인 제122회 US오픈을 골프팬은 예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지켜봤다. “누가 우승을 할까”보다 “어느 진영에 소속된 선수가 우승을 할까”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최근 프로골프계를 강타한 ‘LIV 골프 인비테이셔널’(이하 LIV골프) 영향이다.

LIV골프는 약 600조원 규모 자산을 갖춘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 후원을 받아 독자적으로 출범한 골프 시리즈로 막대한 상금 규모로 미국과 유럽 정상급 프로골퍼들을 유혹하는 중이다. 지난달 10일 영국 런던 근교 센추리온클럽에서 개막전을 성공적으로 치러 내기도 했다. 이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등 기존에 골프계를 주름잡던 조직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골프계는 PGA에 잔류하는 선수와 LIV골프로 향하는 선수,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미국골프협회(USGA)가 주최해 양쪽 진영이 모두 참가했던 US오픈은 PGA와 LIV골프를 대표하는 유명 골퍼 격전장이 됐지만 정작 우승은 무명의 매슈 피츠패트릭(미국)이 차지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승자가 누구냐가 아니었다. 이미 세계 골프계 지각변동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스포츠계 장악한 오일머니

PIF처럼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한 거대 투자자금을 흔히 ‘오일머니’라고 부른다. 이는 특히 스포츠팬에게 익숙한 단어다. 2000년대 이후 유럽축구를 비롯한 스포츠계에 이 자금이 대거 투입된 덕분이다. 2003년 여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중위권 구단 첼시를 러시아 석유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사들여 세계적 구단으로 성장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이어 EPL 맨체스터시티, 프랑스 리그앙 파리 생제르맹(PSG) 등도 각각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출신 구단주를 받아들여 정상급 팀으로 올라섰다. 지난해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자금이 EPL 뉴캐슬을 사들이기도 했다. 유럽과 북미 백인 전유물이던 기존 스포츠시장에 중동과 동유럽 부자들이 뛰어들어 20년간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세계일보

지난 1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라리가 슈퍼컵에서 레알 마드리드 미드필더 루카 모드리치가 결승골을 넣은 뒤 환호하고 있는 장면. A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 최근에는 아예 자국에서 스포츠 이벤트를 적극 개최 중이다. 특히, LIV골프를 후원하는 사우디 자본은 최근 메이저급 이벤트를 자국에서 연이어 열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계 최정상 프로축구리그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슈퍼컵을 2019년부터 10년간 사우디에서 열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정규리그 최상위 팀과 스페인 FA컵에 해당하는 국왕컵 우승팀이 격돌하는 슈퍼컵이 스페인 팬들 앞이 아닌 먼 중동 땅에서 치러지게 된 것. 이를 위해 라리가 사무국이 리그 일정까지 조정하자 스페인 축구계에서 “라리가가 돈 앞에서 팬의 존재를 잊었다”는 비판이 이어지기도 했다.

2020년에는 세계 최고 자동차 오프로드 레이싱대회인 다카르랠리도 유치했고, 프로레슬링 단체인 WWE 경기도 사우디에서 열렸다. 이미 이웃 UAE와 카타르는 F1 레이싱과 프로테니스 투어 등 각종 중량급 스포츠 이벤트 개최지로 자리 잡은 상태에서 중동 오일머니의 큰손인 사우디가 더 큰 규모로 판을 키워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여기에 이제는 해외 유명 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하는 것을 넘어 아예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LIV골프 파동은 그 신호탄이다. 만약 LIV골프가 기존 PGA가 독점한 골프산업에 균열을 내는 데 성공한다면 이런 시도가 축구 등 또 다른 종목에서도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기에 세계가 주목할 수밖에 없다.

세계일보

2020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다카르랠리에서 우승한 카를로스 사인스의 세리머니 장면. A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일머니의 스포츠 산업 진출 목표는?

이런 오일머니의 스포츠산업 진출 목표는 표면적으로는 ‘홍보’다. 압둘아지즈 빈 투르키 알프린스 사우디 스포츠부 대변인은 2019년 “지역 내 ‘스포츠 허브’ 타이틀을 따는 것이 우리 왕국 목표”라면서 “스포츠산업을 통해 사우디를 홍보하고, 또 문화와 엔터테인먼트도 국가 홍보 도구로 활용하려고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기존 산업구조를 개편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다. 21세기 들어 사우디, UAE 등을 주축으로 기존 자원 중심 산업구조에서 탈피해 서비스, 관광 등으로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고, 이를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스포츠가 선택됐다.

그러나 진짜 속내는 다른 곳에 있다는 비판도 꾸준히 나온다. 자원 부자들이 이미지 세탁을 위해 스포츠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 뉴욕타임스는 LIV골프 논란이 극에 달했던 지난 6월 초 “사우디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2018년 반정부 언론인 살해와 예멘 내전 획책 등 악화된 국제사회 이미지 개선을 위해 최근 수년간 초대형 스포츠 행사에 수조원의 오일머니를 쏟아부으며 ‘스포츠워싱’에 정점을 찍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스포츠워싱은 고문과 인권침해 등으로 비판받는 동유럽 석유 부국 아제르바이잔이 2010년대 중반 유럽축구연맹 유로파리그 결승전 등을 유치하는 등 스포츠산업에 적극 진출하려 하자 나온 표현이다. 사우디 외에도 UAE와 카타르 역시 인권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가들이다. 일각에서는 오일머니의 이런 움직임이 정보를 숨기려다 오히려 대중의 관심을 더 끌게 되는 효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최근 격화하고 있는 오일머니의 스포츠계 침공이 어떤 ‘나비효과’로 이어질지 스포츠팬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선수보다 유명해진 스타 구단주들

2021년 5월 열린 첼시와 맨체스터시티(이하 맨시티)의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 결승전은 경기에 나서는 세계적 선수들만큼 관중석 두 구단주에게 관심이 몰렸다. 바로 첼시의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맨시티의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하얀이다.

세계일보

(왼쪽부터) 아브라모비치, 만수르, 알 켈라이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중위권 구단인 첼시와 맨시티를 사들여 세계적 구단으로 성장시킨 인물들이다. 러시아 석유 재벌 아브라모비치가 2003년 먼저 첼시를 인수해 막대한 투자로 스타 선수들을 끌어모아 5번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우승을 달성했고, 5년 후인 2008년에는 아랍에미리트(UAE) 왕자 만수르가 맨시티를 인수해 지난 시즌을 포함해 6번의 리그 우승을 만들어 냈다. 팀의 성공을 일궈 낸 이들에게 축구팬들은 큰 환호를 보냈고, 어느새 이들은 팀이 보유한 스타 선수들만큼 유명인사가 됐다.

막대한 투자로 팀을 성장시키는 구단주를 일컫는 ‘슈거대디’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아브라모비치는 이런 슈거대디의 원조 격, 만수르는 대표 격인 인물이다.

이 중 아브라모비치는 시즌 중 수차례 경기장을 찾으며 첼시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줘 축구팬들로부터 가장 이상적인 구단주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아브라모비치는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촉발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첼시 구단주 자리에서 퇴진하게 됐다. 영국 정부가 아브라모비치의 구단 소유를 반대해 첼시를 강하게 압박했고, 결국 지난달 미국계 자본에 구단 소유권을 넘기고 20년 만에 팀을 떠났다.

만수르 역시 거침없는 투자로 맨시티를 최정상 클럽으로 이끌며 각광을 받아 왔다. UAE 왕가 33명 형제 중 한 명일 뿐이었던 그는 10여년 만에 중동계 투자자본을 상징하는 인물이 돼, 유명세를 바탕으로 세계적 규모로 스포츠를 포함한 투자를 이어 가는 중이다. 그가 소유한 ‘시티풋볼그룹’에는 맨시티 외에도 뉴욕시티(미국), 멜버른시티(호주), 지로나(스페인), 트루아(프랑스), 요코하마 마리노스(일본) 등 무려 12개 구단이 소속돼 있다. 만수르는 이 구단을 매개로 한 부동산 투자를 통해 더 큰 부를 쌓아 가는 중이다. 경기장과 구단시설 개발을 인근 부동산 개발과 묶어 추진해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그의 방식은 이후 비슷한 투자에 나서는 해외 자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최근에는 파리 생제르맹(PSG)의 나세르 알 켈라이피 구단주도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2011년 PSG를 인수한 카타르 국부펀드 의장으로 모국 카타르의 월드컵 유치에도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프로테니스 선수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이어 가며 또 한 명의 스타 구단주로 떠오르는 중이다.

서필웅 기자 seoseo@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