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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질문 몇개 MBTI ‘넌 이런 사람’ 규정 말고 ‘취존’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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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런홀로

엠비티아이가 싫은 이유

‘넌 이런 사람’ 못박는 MBTI

외롭지 않게 짝 찾으라는 참견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관습 대신

어떤 삶이든 모두가 행복해지길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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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대화를 하든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든 티브이(TV)를 보든, 엠비티아이(MBTI)를 언급하는 일이 참 많다. “인티제이세요?” “저는 인프피라서요” 등등.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카페의 새로운 메뉴를 말하는 건지 뭔지, 도대체 뭔 소리인가 싶었는데, 그게 엠비티아이 성격 테스트 결과를 놓고 누구와 누구는 성격 궁합이 맞고 안 맞고를 따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난 엠비티아이를 이야기하는 게 정말 싫다. 엠비티아이를 즐기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재미로 해보는 게 아니겠느냐고 하겠지만 그걸 알아도 싫다. 엠비티아이를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일부러 못 들은 척 피할 정도다. 한창 유행할 때도 혼자 안 하고 끝까지 버텼다. 최근 직장 선배가 하도 해보라고 재촉하기에 버티다 못해 해봤는데, 하면서도 이걸 왜 하나 싶었다. 그렇게 나온 내 엠비티아이는 ‘아이에스티제이-티(ISTJ-T)’였다.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 그래서 엠비티아이를 싫어하나 싶다.

그게 내 성격이라고?




엠비티아이와 같은 유형의 성격 테스트를 싫어하는 이유는 무언가에 규정당하는 게 싫어서다. 내 성격 결과로 나온 아이에스티제이-티를 놓고 보자.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중요시하고 보수적이며 낯선 것을 싫어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성격이라고 한다. 참고 참았다가 터뜨린다고도 한다. 일견 맞고 틀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보수적이고 속을 알 수 없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규칙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새로운 방식이 더 효율적이면, 해왔던 방식을 과감하게 바꾸기도 한다. 감정 컨트롤을 잘 못해 버럭하는 일이 많아 표정 관리 좀 하라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쌓아뒀다 터뜨리는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그때 터뜨려 성격 좀 죽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그래서 넌 엠비티아이 결과 이러이러한 성격이고, 이러이러한 사람과 잘 맞고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게 꽤 불편하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내 엠비티아이가 이래서 그랬던 건가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재미 삼아 하는 게 뭐 어떠냐고 하겠지만 과몰입해서 엠비티아이 이야기만 하거나 이것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이들을 보면 솔직히 많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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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심리 테스트가 싫었던 계기는 중2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심리 테스트를 했었는데 문항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불을 보면 흥분하는가’였다. 불을 보고 흥분할 일이 있나…. 무슨 질문이 이럴까 싶었다. 별걸 다 물어본다 싶을 정도의 질문에 그 양도 꽤 많아서 귀찮은 나머지 대충 찍고 엎어져 잤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요주의 학생으로 분류되어 담임 선생님에게 따로 불려가게 됐다. 찍어도 이상하게 찍어서인지 우울증이 심각한 학생으로 분류돼 요즘 고민이 많은지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차마 “귀찮아서 장난으로 대충 찍었습니다”라고 말을 못 했다. 그 덕분에 나는 1년 내내 성격적 요주의 학생으로 찍혀서 담임 선생님의 근심을 한 몸에 받는 존재가 됐다. 그저 귀차니즘과 중2병이 좀 심했을 뿐이었는데. 그때부터 내 성격이 어떻다고 말하는 유의 모든 것에 거부감을 느끼게 됐다.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생각해보면 독립한 삶이 더 즐겁고 혼자 있는 게 편안한 이유도 그렇다. 누군가가 내 삶에 대해 간섭하는 게 싫고 규정하는 게 싫어서인 듯하다.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있었을 때보다 혼자 사는 지금 조금 더 안정감을 느낀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무늬 그릇 대신 내 취향의 원색 그릇, 거실에 놓은 화분 하나, 소파에 놓은 무늬 없는 쿠션, 보디 용품을 화장실에 놓는 방식까지 내가 좋아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가족과 같이 살 때는 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부모를 떠나 독립했어도 또 다른 가족을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내 삶이 정신적으로 부족하지 않은데 사회가 정해놓은 대로 누군가를 찾아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에, 아직까진 그 필요성을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지인은 늙어서 병들고 외로운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상대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혼자 있으니 쓸쓸하고 외롭지 않으냐고 동의를 구한다. 더 나아가 생식기관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매우 폭력적인 참견까지 들어봤다. ‘혼자인 삶=외로움’이라는 판에 박힌 공식인 셈이다. 이것도 엠비티아이 성격 테스트처럼 날 불편하게 만든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그동안 관습과 인식대로 규정해버리는 것, 그리고 그런 타인의 참견을 들을 때마다 사회는 변한 듯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삶의 방식은 성격만큼 참 다양하다. 남녀가 결혼해서 살 수도 있고 동거만 할 수도 있다. 남-남끼리 살아갈 수도 있고 여-여끼리 살아갈 수도 있다. 범죄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어떤 형태의 삶이든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은 혼자인 게 좋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른다. 내가 50살이 넘었을 때 갑자기 누군가와 여생을 함께하고 싶어 뜬금없이 결혼을 할 수도 있다. 다만 바라는 것은 타인의 삶과 성격을 내 식대로 판단하거나 무언가 규칙을 정해서 얽매이게 하지 않길 바란다는 것이다. 30살 무렵에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든지 아이를 가져야 한다든지 그런 것들 말이다. 사람의 생김새만큼 삶도 성격도 다양하지 않을까. 흔한 말로 “취(향)존(중) 해주세요”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이런 홀로’ 코너가 끝난다고 한다. 코너가 없어지더라도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이 홀로든 둘이든 셋이든 어떻게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삶의 형태가 어떻든 누가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가 행복하고 건강하면 된다. 즐겁게 살자. 우리 모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달려라 도비

※이런 홀로 연재를 마칩니다. 참여해준 필자들과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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