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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헤어질 결심’ 속 ‘마침내’ 영어로 어떻게?…번역가 달시 파켓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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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시 파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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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 사이의 은근한 사랑이 드러나는 중요한 대목에서 여러 차례 사용되는 단어다. 곱씹어봐야 비로소 이해되고 그 감흥이 깊어지는 이 표현은 해외 관객에게 ‘At last’로 번역돼 전달됐다. 의미상 같은 단어인 ‘Finally’가 “말할 때 자주 써서 평범한” 구어체 느낌이라면, ‘At last’는 “(글을) 쓸 때 많이 사용하는 좀 더 특이한” 문어체의 뉘앙스를 풍긴다고 했다.

‘헤어질 결심’ 자막을 번역한 달시 파켓을 장맛비가 내리던 28일 오후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시종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질문에 답하던 그는 마치 한 편의 영화 자막을 번역하듯, 대화 중 정확한 표현을 골라내기 위해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원전 완전 안전’, ‘몸이 꼿꼿해요’…박찬욱 작품 특유의 대사 영어로


달시 파켓은 1997년 잠시 머물 생각으로 한국에 들렀다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뒤 ‘아가씨’, ‘택시운전사’, ‘승리호’ 등 한국 영화 200여 편에 영어 자막을 달거나 감수하는 일을 맡았다.

‘헤어질 결심’으로 다시 만난 박찬욱 감독의 작품을 두고 그는 “대사에 깊이가 있다”고 했다. 미리 받아본 시나리오 번역 초고를 홀로 쓴 뒤 여러 차례 자체 검수를 거치고 “마지막으로 감독님과 두 번 정도 실제로 만나 수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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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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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까다로웠던 표현으로는 ‘원전 완전 안전’을 꼽았다. 해준의 아내 정안(이정현)이 일하는 원전의 홍보 문구인데, 한국어 고유의 언어유희가 담긴 문장을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어 ‘Clearly Cleaner Nuclear’로 표현했다고 한다. 본래 대사에 있던 ‘안전’이라는 의미는 다소 희미해졌지만, 박찬욱 감독은 번역의 어려움을 고려해 때마다 적절한 번역안을 수용한다고 한다.

극 중 해준이 서래에게 감정을 고백하는 대사 “당신은 몸이 꼿꼿해요”는 ‘upright’라는 단어를 써서 완성했다. 한국인으로서도 통상적이지 않은 사랑 표현이라 영어로 바꾼 뒤에도 어색한 감이 남아있었지만, 뒤이어 해준이 그렇게 말한 이유를 부연하기 때문에 의미를 전달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고 했다.

달시 파켓은 ‘헤어질 결심’과 같은 시기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자막도 번역했다. 두 작품이 지난 5월 열린 제75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함께 초청된 까닭에 출품 마감 기한인 3월까지 양쪽 번역을 모두 마치느라 무척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브로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는 서면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둘 다 외국인인 데다가 한국어가 모국어 아니기 때문에 글로 소통하는 게 더 명료한 측면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감독님이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분이라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편할 수도 있지만, 그건 경우마다 다르다”면서“내가 (‘헤어질 결심’ 속 해준처럼) 형사라면 전화로 (취조)하겠지만, (번역가는) 그렇지 않으니까”라며 웃었다.

자막 번역에 정답 없다, 자기 스타일 갖춘 번역자 양성에도 힘써


달시 파켓은 현재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에서 영화 자막 번역을 가르치고 있다. 품질 좋은 한국 영화가 외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는 게 아쉬워서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보면 영화는 괜찮은데 번역이 안 좋아서 해외 영화제게 가지 못한 경우가 있어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그런 게 많이 아쉬웠죠. 큰 배급사를 만난 작품은 번역가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독립영화는 현장 경험이 없는 아는 사람, 예를 들면 미국에서 유학 몇 년 한 친구가 해주는 경우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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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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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막 번역에 “본인의 스타일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같은 대사라도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전달되는 이미지가 다르기에 같은 대사를 “송강호가 연기할 때와 다른 배우가 연기할 때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번역아카데미에서는 “같은 작품을 여러 사람이 번역해 서로 어떻게 했는지 보고 대화한다”고 했다.

“제가 번역하는 걸 따라 하지 말고 자기 스타일대로 하는 게 좋다고 가르쳐요. 하나의 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학생들도 (자기 번역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어요.”

인터뷰 말미에는 번역가들의 계약 관행이 개선돼야 한다는 말을 덧붙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OTT 오리지널 시리즈가 넘쳐나 번역가 활동 무대가 넓어진 까닭이다.

“영화계에서는 영화사와 번역가가 직접 계약하지만, 넷플릭스 같은 OTT는 밴더를 통해 계약해요. 능력이 있는 사람보다 빠르게 번역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거죠. 하지만 저도 초고는 별로인걸요. 앞으로 번역 시스템에 대해 많이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될 겁니다.”

[이투데이/박꽃 기자 (pgot@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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