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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문화와 삶] 우리들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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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는 정말로 중병이 들었나보다. 뉴스를 보거나, SNS에 올라온 글과 사진을 보거나,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흔한 행동거지를 볼 때마다 나는 자주 이런 징후를 느끼곤 한다. ‘질병’이나 ‘진단’과 같은 의료적 용어로 사회문제를 병리화하는 것이 마땅치는 않으나, 나는 곳곳에서 마주치는 이 사회의 물리적·심리적·윤리적 퇴행의 징후들을 보면서 ‘병들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경향신문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며칠 전 자전거 출근길에 있었던 일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인도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기다리는 다른 자전거에게 “약간 비켜서 기다리시는 게 좋겠다”고 한마디 충고를 했다가,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며 큰 싸움이 날 뻔했다. 그의 자존감은 이 정도 말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강고하거나 아주 허약한 것인가 싶었다. “당신은 그렇게 규칙을 잘 지키느냐”는 말도 되돌아왔는데, 남과 견주어 남 하는 만큼만 한다는 노예의 도덕이 개인의 자유로 둔갑한 건가 싶었다.

가수 싸이가 ‘흠뻑쇼’라는 이름(이름도 참 주접스럽지만)의 콘서트에서 식수 500t을 뿌리겠다고 홍보하고 그것을 비판한 배우 이엘의 발언으로 여론이 시끌벅적했던 얼마 전의 일도 떠오른다. 이엘에게는 당장 “피씨 묻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는데, ‘피씨 묻었다’는 말이 정의로움을 과시하고 도덕적 우월감을 내비치는 태도에 대한 혐오 표현인 것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긴 가뭄에 물 500t이 무슨 도움이나 되며 소양강의 수위를 1㎜라도 올리겠느냐는 빗나간 반론에다가 환경엄숙주의라거나 싸이의 문화적 기여를 도외시하지 말라는 제법 고차적인 비판도 나왔다.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윤리적 감각이 아예 망실된 것일까. 이엘에 대해 ‘너는 그래서 무엇을 실천했느냐’는 말도 있었는데, 뭔가를 하지 않는 실천도 뭔가를 하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임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나의 만족을 위해서 하고 싶지만 타인을 위해 하지 않는 것도 그 자체로 사회적 예의이고 실천이다.

예전에는 시뻘건 한우 등심을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굽는 모습 같은 건 남에게 보여주기 껄끄러운 풍경이었다. 옆집에 냄새가 퍼질까봐 창을 꼭 닫고 조심조심 식구에게 고기 몇 점을 먹이곤 했는데, 그 정도는 다들 최소한의 염치로 알았다. 고기가 훨씬 흔해지고 값이 싸졌지만, 여전히 환경 때문이든 고통받는 동물 때문이든 고기를 먹는 게 자랑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이제는 밉지 않게 자랑할 만한 것이 되어 누구나 뻘건 고기 사진을 SNS에 올리고 자랑한다. 우리들이 천성적으로 가진 윤리적 감각은 이렇게 인정 욕구와 과시 앞에서 늘 무릎을 꿇는다. 이런 말을 던지는 나도 결국 ‘피씨 묻은’ 사람인가.

별다른 죄책감 없이 골프를 치고, 스키를 타러 다니고, 나 홀로 승용차를 타는 이들에게도 모두 변명거리는 있다. 일 때문에, 인간관계 때문에, 나 하나 안 한다고 해봐야, 같은 변명이다. 나 역시 친구에게 이런 것들을 사사건건 지적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서 그 친구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일에서는 훨씬 정의로운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는 물론 보장되어야 한다.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사사건건 남의 눈치를 보는 사회만큼 숨 막히는 곳은 없으리라. 그러나 이 시대에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대부분 환경을 해치거나 타인의 고통을 더하는 자유이기 쉽다. 대통령이 35번이나 입에 담은 자유, 시장에서 마음껏 경쟁하며 약자를 누를 수 있는 자유, 하루 12시간씩 근무할 수 있는 자유, 가진 사람은 마음껏 소비하고 부산물을 남길 자유, 전기와 에너지를 펑펑 써서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자유, 내 소중한 삶, 내 취향의 왕국. 이런 사회는 돈 쓸 자유와 소비할 자유를 시민의 자유라고 믿는 사회이며, 시민은 없고 소비자만 있는 사회이다. 이런 곳이 무슨 사회인가, 시장이지.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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