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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죽기 전 찢어야 하는데…” 고 이어령 육필원고 ‘눈물 한 방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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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22년 육필원고로 ‘눈물 한 방울’ 출간

죽음 직시한 ‘가장 진솔한 성찰’ 대학노트에

그림도 직접…제목과 함께 출판사에 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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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선고를 받고 난 뒤로 어젯밤에 처음, 어머니 영정 앞에서 울었다… 울음을 참아야… 죽음의 입자들이 날 건드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차돌이 되어야지. 불안, 공포 그리고 비애 앞에서 아무것도 감각할 수 없는 차돌이… 울고 또 울었다. 엉엉 울었다.”

이어령(1934~2022)이 지난해 7월 남긴 고백이다. 비평·창작을 넘나든 160여권의 저서를 남긴 그를 대개의 사람들은 ‘거대한 지성’으로 기억하겠으나, 정작 그가 사신에게 터놓은 말미의 말, 아니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를 혼잣말은 ‘눈물’이었다. 지난 2월26일 영면한 그의 2019~2022년 미공개 육필원고를 묶어 낸 책 제목 또한 <눈물 한 방울>(김영사)일 수밖에 없다.

그 ‘눈물 한 방울’은 기억되는 삶과 더 기억하고 싶은 삶 때문이다. 뜰을 찾아온 참새 한 마리에, (어머니가 닦아주던) 콧물, (젊은 시절에, 그러나 지금은 까닭을 알 수 없는) 밑줄 친 단어들, 손으로 쓴 전화번호책, 먼 나라 소인의 그림엽서에도, 아침에 온 신문, ‘또 만나’라는 말에도 눈물 한 방울씩 맺혀둔다. 그는 이 모두를 시처럼 적었다. 자기 연민이나 비감이 아닌, “외로운 개인만이 남의 평등을 인정한다. 당신도 나처럼 혼자인 것을 안다. 평등한 슬픔이 외로움이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나에게 걸어오는 이유다”라는 성찰의 가장 진솔한 심상인 셈이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쓴다는 손글씨는 말마따나 “초딩의 글씨”가 되었다. 대신 그 감각이 유년 시절로 이끌고, “태어나기 전의 일”의 보편성까지 불러온다. 무덤과 자궁이 동의어(tombos)인 그리스어에서 찾는 죽음의 의미, 인공위성과 에펠탑으로 짚어보는 무익함의 유용성, “참꽃에 볼때기 덴 년” “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같은 옛말서 들춰낸 한국 ‘막문화’의 생동성 따위엔 특유의 주술적 설득이 있다.

그에게 처음 암이 기별한 건 2017년이다. 이후는 투병(鬪病)이라기보다 수병(受病)이다. “이 낙서장을 죽기 전에 찢어 없애야 하는데 그럴 만한 힘도 없다… 가슴도 온몸도 침몰한다”는 병고(2020년 6월)는 이듬달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내 마음은 흔들린다. 살고 싶어서”로, “가야겠다…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이름만 갖고 가자”로, “누가 함께 슬퍼하면 나는 견디지 못한다”로 전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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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전 이어령의 유족들과 출판사 김영사가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고인의 미공개 육필원고와 이를 바탕으로 한 책 <눈물 한 방울>을 소개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강무(백석대 교수), 이승무(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강인숙(영인문학관 관장), 고세규(김영사 대표). 김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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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거듭 “죽음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유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남아”(2021년 3월)서다. 써야 한다는 ‘백지’의 공포, 동시에―그 종이만이 제 뜻대로 찢어버릴 수 있다는―백지에의 자유 안에서만 존재한 저자 스스로의 지독한 글 감옥 때문이겠다. 그 글(로 바쁜 아버지)이 미웠던, 그러다 세상을 먼저 떠난 딸(<땅끝의 아이들>·이민아·2012년 별세)을 회한과 비통 속에 품고 살아야 했음에도 말미 “소복을 한 백지장 위에 발자국을 찍는다. 맨발이어야 하고 얼어 있어야 하고 심장만 화로 같아야 한다”(2020년 1월)고까지 말하는 소명적 글쓰기를 이어령은 올 초 비로소 ‘마감’한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남은 말, 사랑이라든가 무슨 별 이름이든가 혹은 고향 이름이라든가?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 시인들이 만들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지상에는 없는 말, 흙으로 된 말이 아니라 어느 맑은 영혼이 새벽 잡초에 떨어진 그런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 몸이 바로 흙으로 빚어졌기에 나는 그 말을 모른다. 죽음이 죽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2022년 1월23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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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이 남편 이어령이 남긴 미공개 육필원고를 소개하고 있다. 김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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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문단에 파란을 일으킨 ‘우상의 파괴’(1956년)와 함께 새 시대의 진로를 비추는 ‘등대지기’를 자임하고 많은 이들이 그 불빛에 의탁한 지 66년 만이었다. 이번 책을 펴낸 유가족들은 2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이어령 선생은 육필원고 자체가 굉장히 적다”며 “육필원고는 종이가 표정을 짓고, 글씨(체) 보면 또 성격 나타나고, (원고에 쓰는 일부터가) 육체노동으로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내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글 쓰는 데 지장이 있으니 주사도 거부하셨다”며 “나 또한 그럴 것이다. 그분의 죽음이 내 죽음이다”라고 말했다. 육필원고는 현재 더 보관 중으로 향후 추가 출간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글·사진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김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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