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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김용갑 “계엄령 발동 직전 내린 ‘6.29 선언’...한국 초유의 위로부터의 민주화 혁명” [송의달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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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 35주년’ 특별 [송의달이 만난 사람]...김용갑 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86) 전 총무처 장관은 우리나라 ‘보수의 원조(元祖)’ 또는 ‘보수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6공화국 시절 그는 “이 땅에 우익(右翼)은 죽었는가. 좌파세력을 척결하라”고 외치면서 장관 자리에서 자진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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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은 2022년 6월22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6·29 선언은 ‘집권층의 공개적 민주화 선언’으로는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말했다./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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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입문 5년째인 2000년에는 당시 여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를 ‘조선노동당 2중대’라며 정면 공격했다. 2004년 9월23일 국가보안법 철폐 반대 관련 5분 자유발언 도중 국회 의정 단상에서 쓰려져 병원으로 실려가기도 했다. ‘건전한 보수’ 기틀 확립을 위해 그만큼 몸과 마음을 다 쏟아 애쓴 이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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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갑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2004년 9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국가보안법 폐지 결사반대’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조선일보DB


◇‘강경 보수’...12년만에 초·중교 졸업

경남 밀양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네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는 7년, 중학교는 5년 만에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밀양 내 3개교를 전전(輾轉)하면서 마쳤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이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육군 소령으로 예편후 안기부 기조실장 등을 지냈다.

그는 만 50세이던 1986년 1월 전두환 대통령에 발탁돼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한국 현대사에 본격 등장했다. 5공화국 마지막(1988년 2월)까지 2년 2개월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서슴없이 직언(直言)하고, 책상 보다 현장을 즐겨 찾는 참모’로 꼽혔다.

특히 권력 핵심부로 민심(民心)의 향배를 가감없이 전달해 1987년 6월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발표한 ‘6.29 민주화 선언’을 성사시킨 주역 중 한명으로 꼽힌다. ‘6.29 선언’ 35주년을 앞두고 이달 22일 낮 서울 이촌동에 있는 김 전 장관 자택을 찾아가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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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29일 전격 발표된 6·29 민주화 선언’을 보도한 같은 날 조선일보가 발행한 호외(號外)


-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6.29 선언’ 얘기가 거의 사라졌다. 왜 그런가?

“서해에서 북한에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처럼 문재인 정권이 역사 분야도 왜곡하고 조작한 탓이다. 4년 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도로 ‘6.29 선언의 진상(眞相)과 평가’라는 사업을 시작해 반쯤 진행하다가 갑자기 중단됐다. 정권의 지시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후 문 정권은 4년 내내 6.29 선언에 대한 왜곡폄하를 일삼았고 객관적인 평가를 가로막았다. 문 정권과 같은 ‘내로남불식(式)’ 역사해석이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된다.”

- ‘6.29 선언’ 직전 상황은 어땠나?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護憲)조치를 발표했다. 이어 6월10일 노태우 대표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그날 ‘넥타이 부대’라는 회사원들까지 가담한 6.10 시위가 벌여졌고 3000여명의 시위대가 서울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이후 전국 18개 도시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됐고 6월 26일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100만여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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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이뤄진 1987년 6월 10일 시위 모습/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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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 발동 수차례 검토...긴박한 순간”

- 긴장된 날들이었겠다.

“그렇다. 같은 해 6월 14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시국(時局)수습 대책회의에서 계엄령, 군 투입 같은 비상(非常) 대책이 논의됐다. 치안본부장(지금의 경찰청장)이 ‘경찰력으로 수습할 수 있다’고 했지만, 정권 안에서는 이후 수차례 계엄령 발동을 검토했다. 또 전국에 계엄령이 언제든 가능한 대기 상태가 계속됐다. 전두환 대통령은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국민투표를 거쳐 직선제로 가자’는 생각이었다. 서슬퍼런 5공 시절 청와대에서 그의 뜻을 거스르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전무(全無)했다.”

- 만약 전 대통령 뜻대로 했더라면 어땠을까?

“시위가 격화되고 경찰력으로 막지 못하면,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을 것이다. 그러면 십중팔구 유혈(流血) 사태가 났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모습은 없었을 것이고 제2, 제3의 광주(光州)사태 발발로 우리는 후진국으로 퇴행했을 것이다. 나는 ‘계엄을 선포하면 시민들이 탱크 위에 올라가 저항할 것’이라고 현장 민심을 전했다.”

- ‘6·29선언’ 발표에 어떻게 막후(幕後) 역할을 했나?

“6월 18일 오전 9시20쯤 대통령을 독대(獨對)한 자리에서 ‘각하 지금 임기가 얼마 남았습니까?’라고 말문을 열었다. 나는 ‘8개월 정도 남았는데 지금 상태로는 민심을 수습할 수 없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직선제를 받아주고 싸워서 이기자’며 40분쯤 역설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문구도 써가면서. 야당의 김대중(DJ)도 풀어줘 야당 후보들끼리 경쟁시키는 등 정치공학적 계산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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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이 1987년 6월 18일 오전 전두환 대통령과 독대 자리에서 정국 수습 방안 보고용으로 작성한 육필(肉筆) 메모. 그는 2022년 6월 22일 기자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당시 메모를 공개했다./송의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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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의 1987년 6월18일 대통령 독대 메모. 그는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획기적인 구상으로 승산 가능성이 있다'고 적었다./송의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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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어지는 말이다.

“그 자리에서 ‘만약 지면 야당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잃었던 민심을 일거에 회복할 수 있는 방도’라고 했다. 당시 내 머릿속엔 직선제를 하면 김영삼·김대중 두 명 다 나와서 단일화가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보수 민심만 흩어지지 않게 공략하면 이길 수 있다고 봤다”

- 반응은 어땠나?

“전 대통령이 ‘당장 노 대표에게 가서 이야기하라’고 하더라. 노태우 대표를 만났더니 ‘내가 전국을 돌면서 내각제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는데 갑자기 말을 바꿀 수 없다’며 수용 불가 의사를 밝혔다. 그날 밤 안무혁 안기부장,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과 3인 회의에서는 고성(高聲)이 난무했다. 두 사람은 크게 화를 내며 ‘야당에게 정권을 갖다 바칠 작정이냐. 당신 그쪽 첩자 아니냐’며 손가락질하며 나를 비난했다.”

김 전 장관은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내 일생에서 가장 위험하고 아찔한 순간이었다”며 “다음달(6월19일) 전 대통령이 노 대표의 반응을 묻길래 ‘검토 중인 모양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바로 경호실장을 불러 ‘오늘 밤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노 대표와 저녁 회동을 잡으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직선제 수용하자’...‘당신 첩자지?’ ”

- 이후엔 일사천리로 진행됐나?

“다음 날인 6월 20일 오전 9시30분쯤 대통령을 뵜더니 대통령께서 ‘노 대표가 지도자의 정치 노선이 왔다갔다 하면 되겠냐고 하던데’라고 했다. 이에 나는 ‘나라가 망하는데 정치노선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라고 맞받았다. 전 대통령이 ‘그렇지…지금 정치 노선이 중요한 게 아니지’라고 중얼거렸다. 이후 여러 정치 원로(元老)들의 의견 등을 수렴해서 6월 29일에 노태우 대표가 ‘6.29 민주화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 당시 심정은 어땠나?

“6월 29일 아침 운동하러 갔다가 만감(萬感)이 교차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발표 때까지 일주일 넘게 잠도 못자고 공황 상태였다. 대통령은 물론 정권 핵심부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판을 뒤집는 주장을 했으니 얼마나 긴장됐겠나. 우리나라에 천운(天運)이 있었던 건지…. 대통령이 내 건의를 수용했고 노태우 후보도 당선되고 여러 일들이 잘 됐다. 내 인생에서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이 가장 보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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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이 나오자 김영삼, 김대중 같은 야당 정치인은 물론 정치권과 기업, 대학, 언론 등 모든 국민이 환영했다. 신문사들은 호외를 발행했고, 다방과 식당들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 하루동안 무료로 음료나 음식을 제공했다. 사진은 6.29선언 당일 서울 시내 가화다방 앞/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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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9 선언의 ‘역사적 의의’라면?

“일각에선 5공 집권세력의 일시적인 양보 또는 충격 요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6·29선언은 ‘집권층의 공개적 민주화 선언’으로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청와대를 정점으로 정권 수뇌부 안에서 치열한 논쟁과 투쟁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6.29 선언은 국민 요구를 100% 수용해 이뤄진, 사상 초유(初有)의 ‘위로부터의 민주화 혁명’이었다.”

- 청와대 민정수석 자리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그렇다. 민정수석 한 명만 잘 써도 대통령과 정부의 실패를 막을 수 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민정수석을 잘 고르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조국 같은 사람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한 문재인 정부도 실패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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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5일 낮 청와대 검찰총장 임명장 수여식이 끝난 뒤 조국 당시 민정수석(사진 왼쪽)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청와대 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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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직접 확인...民心 가감없이 直言”

- 민정수석으로서 현장을 돌며 ‘민심’을 열심히 수집·보고했다고 들었는데.

“1986년 4월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야당의 직선제 대규모 시위 때, 나는 점퍼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현장에 들어갔다. 발각됐으면 난리가 났겠지만. 대통령에게 보고하려면 내 눈으로 현장을 봐야 되겠다 싶었다. 이듬해 6.10 시위 당일 밤에는 신분증 등을 모두 인근 파출소에 맡겨놓고 시위대가 모여있는 명동 성당에 몰래 들어가 살펴본 뒤 ‘시위대의 퇴로(退路)를 열어주자’고 경찰 지휘부에 건의했다. 그래서 대다수 농성자들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직선제 수용에 반대하는 고위 인사들에게 나는 ‘현장에 가보셨습니까’라며 설득했다. 5공 말기 광주(光州) 지역 민심 수렴차 관용차 아닌 택시를 타고 시내 곳곳을 돌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숙소도 호텔 아닌 조그만 여관을 잡았다. 86년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요트 경기장이 인분(人糞)으로 오염됐다’는 신문 보도를 접하고는 혼자 부산에 내려가 신분을 숨기고 잠행(潛行)하며 진상을 파악했다.”

- 대통령에게 직언(直言)도 많이 하지 않았나?

“그렇다. 밤 9시 뉴스가 시작되면 전두환 대통령 기사가 맨 먼저 나오는 ‘땡전 뉴스’ 를 중단시켰다. 대통령에게 ‘대한항공(KAL)기가 러시아 상공에서 격추돼 269명이 숨졌을 때도 뉴스 첫머리에 대통령의 새마을 청소 동정이 나갔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이 얼굴을 붉히며 ‘내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하더라.”

그는 다른 사례도 공개했다.

“전 대통령이 퇴임후 연희동 사저(私邸)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등 대대적으로 고치려 했다.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각하, 택시를 타니까 운전기사가 연희동에 아방궁을 짓는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합디다.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했다. 그래서 집 내부를 조금 손보는 걸로 그쳤다. 대통령이 퇴임할 무렵, ‘동생(전경환)을 국회의원 시켜주면 어떨까’라고 내 의사를 물었다. 그때 나는 단호하게 ‘안 됩니다. 전경환은 정권이 바뀌면 큰 대가를 치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자신의 기분 하나 맞춰주지 않는 나에게 대통령이 많이 섭섭했을 것이다.”

김 전 장관은 “내가 직언을 너무 많이 하니 경호실장으로부터 ‘민정수석은 아침보고를 하지 말아달라. 대통령이 민정수석의 보고를 아침에 받으면 하루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직언 수용하는 리더의 역량·그릇 중요”

- 쓴 소리를, 직언을 거침없이 한 비결이라면?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기회를 줬는데 편하게 내 한 몸만 지켜려[保身]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쭉 갖고 있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내가 이 정도까지 왔으면 됐지 무슨 자리를 더 욕심내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는 “민정수석으로 근무하면서 언제든 그만 둔다는 각오로 항상 호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녔다. 실제로 한 번은 사표를 냈는데 반려됐다”며 “직언 자체 보다도 직언을 수용하는 리더의 역량과 그릇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김 전 장관은 만 60세인 1996년 고향인 경남 밀양·창녕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당선 2년 후인 1998년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자신도 암(癌) 수술을 받는 어려운 고비를 딛고 2008년까지 3선(選) 국회의원을 지내고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내 돈으로 교과서 한 권 살 수 없었을 정도로 빈곤했다”며 “아내가 뇌졸중(腦卒中)으로 쓰러진 뒤 의정활동 내내 술이나 담배는 물론 골프와 같은 돈 들어가는 비싼 운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책 사는 돈만큼은 절대 아끼지 않고 손이 가는대로 사서 읽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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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이 1999년에 쓴 저서. 국회의원으로서 1년 넘게 부인을 간병하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기록을 담았다./행림출판


김 전 장관은 초선 의원 시절 ‘나라의 안보를 걱정하는 모임’을 구성해 좌장(座長)을 맡았다. 67명의 국회의원들이 참여한 이 모임은 국회내 최대 의원 공부 모임이 됐다. 그는 2008년에 낸 저서 <굿바이 여의도 : 원조 보수 김용갑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서 “내 평생 국회의원 직을 걸고 사력(死力)을 다했던 것이 바로 대한민국에 건전한 보수의 기틀을 다시 세워내는 것”(26쪽)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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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의 저서 <굿바이 여의도>. 그는 이외에도 <김대중 정부 대북 안보정책 백서> <국가보안법을 이야기 한다>, <금강산 관광 백서1,2>,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등의 저서를 냈다./중앙북스


◇“결단력있는 尹 대통령 모습, 全 대통령 닮았다”

- 보수 재건에 매진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나?

“1980년대 후반 당시 386운동권 학생들이 ‘가자 북(北)으로’를 외치며 북한의 선전 구호와 흡사해지는 걸 보고 ‘나라가 북한식(式)으로 통일될 수 있겠다’는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1989년 6월말 임수경 양의 46일간 방북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보수 가치 수호’라는 목표와 대의명분이 있어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안보와 이념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슈에서는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을 가졌다. 그래서 반대당의 국회의원들과도 존중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는 원로들의 모임인 7인회 멤버로 활약했던 그는 지금 ‘국민의 힘’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 곧 출범 두 달을 맞는 윤석열 정부에 조언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2021년 6월29일, 서울 양재동 윤봉길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선언과 함께 정치에 입문했다. 1년 만에 맨 주먹으로 대통령이 된 그는 자녀가 없고 정치인들에게 빚지거나 크게 신세진 것도 없다. 따라서 오직 어려워진 나라를 바로세우고 국민들을 잘 살게 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해 성공한다면 평생의 영광은 물론 한국 현대사의 영웅이 될 수 있다. 이 점을 명심하고 노력하길 바란다.”

◇“출세 목적 정치인은 이제 필요없다”

그는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은 참모에게 믿고 맡기고 결단력과 추진력있는 윤 대통령의 모습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닮았다. 의지와 결단, 용기는 훌륭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정권이 잘못 갈 경우 직언을 듣고 궤도를 빨리 수정해야 한다. 직언하는 사람을 가까이에 반드시 두어야 한다”고 했다.

- 원로(元老)로서 기성 정치인·정치 지망자에게 충고한다면?

“출세 방편으로 정치를 해서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공천(公薦)에서도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런 정치인은 이제 필요 없다. 지역구 발전은 기본이고 왜 정치를 하는 지에 대해 확고한 목표와 각오, 즉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굳은 심지(心志)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고, 정치가(政治家)로도 대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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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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