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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오늘의 애도는 내일 울고 있을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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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빼앗긴 삶 24522

[기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애도


한겨레

일러스트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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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제는 괜찮은 걸까. 2년 이상 뉴스를 도배하던 코로나19가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마스크를 제외하곤 예전과 별로 다른 게 없다. 조금 더 늘어난 재택근무와 화상회의, 조금 더 흔해진 도시락과 배달음식, 조금 더 좁아진 인간관계가 남았을 뿐이다.

예전보다 상황이 좋아진 게 사실이다. 일일 신규 확진자는 1만명 미만으로 줄었고 사망자는 10명 미만으로 줄었다. 위중증, 준중증, 중등증 병상 가동률은 모두 5% 내외로 떨어졌다. 재택치료가 자리잡아 생활치료센터가 사라졌으며 검사 수요가 줄어 임시선별진료소가 사라졌다. 신속항원검사부터 대면진료까지 동네병원에서 이뤄진다. 확진자의 7일 의무격리가 아직 남아 있으나, 감염자도 줄고 검사받는 사람도 줄어서 한때 200만명에 달하던 재택격리자는 5만명 미만으로 감소했다.

여전히 코로나19는 만만치 않은 질병이며 가을 재유행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 몇몇 국가에선 백신 면역 감소와 오미크론 하위변이 유행으로 인해 입원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일상 속에서 검사하고 치료하는 시스템이 구축된 이상, 개인방역에 힘쓰면 예전과 같은 혼란은 피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여전히 있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 감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형태의 ‘사회적 종식’은 이미 달성된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한겨레>의 기획 ‘코로나로 빼앗긴 삶’은 바이러스와의 싸움 중 발생한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을 조명한다. 2만4천명의 코로나19 사망자와 통계에 잡히지 않는 간접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 생명 피해는 요양병원, 정신병원, 노인시설, 장애인시설 등 가장 취약한 곳에 집중됐다. 방역 공무원과 의료진, 돌봄 인력들은 밤낮없이 동원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진됐다. 백신 이상반응을 잘 다루지 못해 사망한 피해자도 있었다.

그저 목숨을 잃지 않는 것만이 삶은 아니다. 생업을 이어나가지 못한 자영업자들,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은 대면서비스업 노동자들, 교육과 교류의 기회를 박탈당한 학생들, 만남과 여흥이라는 일상을 침해받은 청년들, 독박 육아에 시달린 엄마(아빠)들, 시설이 닫히며 의지할 곳을 잃은 어르신들, 우울증 환자들, 종교인, 노숙인, 외국인, 장애인… 촘촘히 짜인 사회경제 연결망의 붕괴로 수많은 사람이 ‘삶’을 잃었다. 자랑스러운 케이(K)방역, 치명률 세계 최저, 세계 최초 엔데믹 전환 등 공허한 구호가 흩날릴 때 ‘개인’은 아스라이 스러져갔다.

■ 가치 있는 희생이었나


정직히 말하자. 이 희생은 일차적으로 바이러스 때문이다. 재난을 맞아 아무런 피해 없이 살아남을 순 없는 법이다. 이 피해는 전방위적이었고 전지구적이었다. 우리나라가 특별히 못해서 더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피해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적은 편이다. 한국의 누적 확진자 수는 인구 10만명당 약 45명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15~20% 수준에 불과하다. 간접사망을 가늠할 수 있는 초과사망 규모도 해외에 비해 현저히 작았다. 물론 우리보다 보건 피해가 적은 국가들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일상과 경제활동에 대한 침해가 비교적 적은 방식으로 유행을 통제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이동량 감소 정도는 주요국 중 가장 적은 축에 속한다.

다만 상대평가는 상대평가일 뿐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낫다 해도 누군가 잃어버린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과연 이 손실을 진짜 피할 수 없었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어떤 손실은 타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지만 어떤 손실은 가치 없는 낭비이기도 했다.

특히나 단기전에 급급하여 장기전에 대한 준비가 소홀한 점은 뼈아프다. ‘향후 2주가 고비’라며 2년에 걸쳐 써야 할 자원을 2주 단위로 쏟아부었다. 인력과 시설을 차근히 보강하기보다 희생과 헌신을 강요했다. 방역 조치에 순응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늦었고 모자랐다. 과학적 근거 없이 장례를 막아 희생에 대한 적절한 애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최대치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때때로 공공연한 사회적 낙인을 방조했다. 상대적으로 위험이 적은 사람에게까지 같은 강도의 순응을 요구함으로써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 사이 갈등이 커졌고, 급기야 가장 협조가 필요한 순간 더 이상의 인내를 요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이었던 오미크론 유행 때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우리가 더 준비되었다면, 분명 막을 수 있는 피해였다.

■ 살아남은 자들의 과제


희생을 뒤로하고, 어쨌든 우리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자들의 과제는 사라져간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의 상실을 애도하는 것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다. 그러나 애도가 슬픔의 발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재난 피해를 극대화시킨 건 코로나19 이전부터 존재하던 시스템의 결함이었다. 이 다음에 올 크고 작은 위기를 더 적은 희생으로 막기 위해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은 근본적인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수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여기서는 세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과학과 정치를 아우르는 위기대응 체계를 갖춰야 한다. 현 정부가 강조하는 근거 중심의 ‘과학방역’은 기본이며,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한정된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는 ‘방역 정치’를 그 위에 더해야 한다. 특히 정책을 수행하는 인력과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야 한다.

둘째, 집단을 위해 소외되는 개인이 없도록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부터 백신 접종까지, 전체를 위한 조치는 때로 개인에게 불균형한 피해를 입힌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앞으로의 방역 정책은 의무보다는 자율의 토대 위에 구축되어야 한다. 위기의 심각성으로 인해 강제적 조치가 불가피하다면,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개인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셋째, 누구나 아프면 쉴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상병수당 시범 적용 등 최근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매우 긍정적이나, 제도의 성공적인 안착은 인식의 변화를 수반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도 상기할 만하다. 기본적인 근로시간이 줄고 업무 공백 시 대체근로가 활성화되어야 아픈 사람이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게 된다. 비만, 우울증, 롱 코비드 등 코로나19의 직간접 영향에 의한 건강 문제는 근로 공백으로도 이어지며 앞으로 시급히 다뤄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한겨레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하나의 관념이 위 세가지 제언을 관통한다. 우리 주변의 가장 약한 자를 돌보는 게 곧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점이다. 코로나19는 너와 내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 드러냈다. 그래서 애도는 오늘 울고 있는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일 울고 있을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애도’는 현재진행형이다.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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