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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세상읽기] ‘더 많이 일할 자유’와 진보정치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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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고용노동부에서 ‘주 52시간 상한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주 단위로 연장근로를 제한하는 현행 제도를 월 단위 제한으로 바꾸겠다는 게 골자다. 이렇게 되면 산술적으로 주 92시간까지 일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비판이 단박에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당시 스타트업 청년들에게 들은 얘기라며 ‘주 120시간 일할 자유’를 말하던 대목이 떠오른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도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젊은 세대들이 ‘시간 주권’을 중시하면서 “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경향신문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자유, 주권. 노동자들이 원하는 바를 반영하는 것뿐이라는 식이다. 노동자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다면 쉽게 깨질 얘기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분명히 어떤 노동자들은 ‘더 많이 일할 자유’를 원하기도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다. 커리어와 실적을 쌓으며 열심히 성장해야 한다는 목표의식. 특히 생존경쟁이 치열하고 헤드헌팅이 활발한 스타트업에서 ‘워라밸 찾으면 성장 못한다’는 식의 담론은 흔한 편이다. 기본급이 낮아 특근·잔업수당으로 벌이를 충당해야 하는 제조업 노동자들에게도 연장근로 제한은 곧 생계의 문제다. 건 단위로 수당을 받는 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들은 애초에 근로기준법의 보호대상도 아니다.

이런 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더 많이 일할 자유’를 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분명 어떤 노동자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그것을 원할 수 있다는 거다. 이들이 얼마나 다수인지는 몰라도, 윤 대통령과 이 장관이 말하는 근거를 호쾌하게 기각하기엔 이런 노동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면 그 자유를 무한정 보장해야 하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음은 윤 대통령이 스스로 확인시켜준 바 있다. ‘주 120시간 일할 자유’를 얘기했을 때나 ‘불량식품 먹을 자유’를 얘기했을 때의 여론을 상기해보라. 적어도 그런 극단적인 ‘자유’에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표현을 배제하면 어떨까. 예컨대 ‘정부의 코인 투자 규제는 정당한가’라는 질문. 개인들의 ‘잃을 자유’도 보장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는 응답률이 높은 편이지만, 코인 투자자로 한정하는 경우 규제 강화에 동의하는 입장이 소수의견이 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즉 ‘정부 개입 대 개인 자유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사안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그 차이를 결정하는 요인은 그것이 ‘나의 문제’인지 여부다. 지금은 윤석열식 자유론의 반대편에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 언젠가 자유의 지지자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윤 대통령의 임기 내내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자유라는 이름의 파도로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구축해온 사회적 방파제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종종 반복될 테다. 많은 경우 정부 개입을 주장해야 하는 진보정치는 그 시도에 맞서 무엇을 해야 할까. 예컨대 연장근로의 문제를 ‘일을 더 시키려는 자본가’와 ‘일을 줄이려는 노동자’의 대립으로만 접근하면 간단하고 쉬운 문제이지만, ‘일을 더 하고 싶거나 더 해야만 하는 노동자’에게 진보정치는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연장근로의 문제가 단순히 그것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힌트’다. 왜 어떤 노동자들은 더 많이 일할 자유를 원하게 되나. 사회 전반의 임금수준을 높이고 효과적인 복지제도를 통해 실질 소득을 증대시킬 때, 또 사용자의 부당한 연장근로 지시를 모든 노동자가 두려움 없이 거부할 수 있을 만큼 노동법이 강화될 때 ‘더 많이 일할 자유’는 비로소 선택의 문제가 된다. 이처럼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미래상을 기획하고 그것을 명료한 언어로 시민들에게 설득해내는 것, 윤석열식 자유론에 맞서려면 진보정치가 해내야 한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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