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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50년 전으로 역주행한 날… 독일은 임신중지 광고 80년 만에 '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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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시대 만들어진 '임신중지 광고 금지법' 폐지
한국일보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23일 유럽연합(EU)-서발칸 정상회담이 열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브뤼셀=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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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나치 시절 만들어진 ‘임신중지(낙태) 광고 금지법’을 약 80년 만에 폐지했다. 공교롭게도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권 보장 판례를 뒤집은 날, 이러한 결정이 나와 더욱 눈길을 끌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연방대법원이 '24주 내 임신 중지'를 여성의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1973)' 판례를 뒤집은 지난 24일(현지시간), 독일 의회는 임신중지 광고 행위 등을 금지한 형법 291a조를 폐지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이 조항에 따라 그동안 독일에선 임신중지 관련 정보를 제공하거나 임신중지 수술을 한다고 홍보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고, 이를 어길 경우 최대 2년 징역형 또는 벌금형에 처해졌다. 낸시 페이저 내무장관은 “형법 219a조가 폐지되면서 모든 여성의 자결권과 안전이 더 강화됐다”며 환영했다.

219a조는 나치 치하이던 1993년에 제정됐다. 당시 나치 정권은 임신중지를 반역과 동일시하면서 임신을 중지한 여성을 실형에 처할 수 있게 하는 등 출산 장려 정책을 적극 도입했다. 이 조항도 ‘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신설됐다. 219a조 폐지는 여성의 기본권 보장과 의료진 보호뿐 아니라 나치 시대 유산을 청산한다는 의미도 있다.

현재 미국에서 임신중지권을 놓고 진보와 보수가 격돌하듯, 독일 사회도 219a조 존폐를 놓고 적잖은 진통을 겪었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집권 시절이던 2019년에도 폐지 논의가 진행됐지만 당시 연립정부에 참여한 기독민주당이 반대해 결국 무산됐다. 그러다 지난해 말 올라프 숄츠 총리 주도 아래 사회민주당, 녹색당, 자유민주당이 연정을 꾸리는 과정에서 219a조 삭제에 합의하면서 법안 폐지를 이룰 토대가 마련됐다.

다만 이번 법률 개정은 '임신중지 광고 제한'만을 폐지할 뿐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수준까지 변경되지는 않는다. 독일은 임신한 여성의 생명과 건강이 위태로운 상황을 제외하고는 임신 12주 이후 임신중지를 금지하고 있다. 유럽에서 많은 국가가 의료진 상담 의무화를 비롯해 여러 규제를 두고 있지만, 독일처럼 정보 전달과 홍보 자체를 금지한 나라는 없다.

마르코 부쉬만 독일 법무장관은 의결에 앞서 “임신중지 관련 정보 제공을 금지한다는 이유로 자격을 갖춘 의료진을 형사 처벌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는다”며 “우리가 지금 이 논쟁을 끝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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