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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낙태 피의자' 될 수 있으니 생리주기 앱 지워라"...임신중단권 폐지에 떠는 미국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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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권 보장 판례를 뒤집은 후 임신중지권 옹호론자들이 26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연방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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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방대법원이 반세기 가까이 유지돼 온 임신중단권 보장 판례를 뒤집으면서 미국 여성들 사이에선 공포가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전문가들도 여성의 출산 선택권을 제한하는 폭력적인 공권력의 확장을 우려하고 있다.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가 폐지된 24일(현지시간) 미국 트위터에는 “생리주기를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앱)을 당장 지우라”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포털사이트 검색, 전자상거래 등을 통해 웹상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일상이 된 사회에선 여성들이 생리주기 관리 앱에 기록한 데이터가 이들을 임신중단 피의자로 기소하기 위한 증거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버지니아대 법학교수인 다니엘 시트론은 CNN에 “생리를 하다가 멈추고 짧은 기간 내에 다시 생리한다는 기록이 있으면 이는 임신중단을 시도한 여성이나 해당 시술을 행한 의사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이 같은 디지털 발자국들을 합치면 특정 인물의 상세한 프로필을 만들 수 있다고 전했다.

이에 생리주기 앱 개발자들은 사용자 데이터를 익명화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체온 데이터에 기반해 가임기·생리주기 등을 예측해주는 피임 앱인 ‘내추럴 사이클스’는 25일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세상에 대비해왔다”며 “우리조차도 사용자를 식별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 사용자들이 완전히 익명화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 밝혔다. 생리주기 관리 앱인 ‘플로’도 사용자들이 계정에서 개인 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익명 모드 기능을 곧 출시할 것이라고 전했다. 독일에 기반을 둔 앱인 ‘클루’는 “자사가 유럽 개인정보 보호법을 적용하는 독일과 유럽 법원 관할 내에 있으므로 미국이 우리 사용자 데이터를 소환할 수 없다”며 이용자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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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권 보장 판례를 뒤집은 후 임신중지권 옹호론자들이 26일(현지시간) 백악관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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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출산 선택권이 막힐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임신중단 약물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로 대 웨이드 판례가 폐기된 날 임신중단 약물을 알선해주는 비영리단체 ‘저스트 더 필’에는 예약 문의가 100건 가까이 접수됐다. 이는 평소 문의의 약 4배로,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곧바로 임신중단 금지에 나선 텍사스주 등 지역에서의 문의가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텍사스주는 지난해 9월 임신 6주가 지나면 임신중단 수술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임신중단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 ‘플랜 C’는 하루 접속자가 500명에서 2만5000명으로 늘었다고 밝힌 바 있다. ‘플랜 C’의 공동 창립자인 엘리사 웰스는 “접속자 중 대부분이 임신중단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주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웹사이트의 ‘임신중단 약물 제공’ 페이지로 바로 간다”고 CNN에 말했다.

NYT는 미국에서 임신중단의 과반이 이미 약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수요가 급증해 임신중단 약물 처방이 법적 분쟁의 새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의약품 임신중단을 원하는 여성은 이를 허용하는 주 경계를 넘어가 의사를 만나거나 전화나 영상 또는 온라인 서류 작성 등의 방식으로 상담한 뒤 우편으로 약을 수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임신중단을 법적으로 불허하는 주 정부가 의약품 임신중단을 단속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라고 NYT는 지적했다.

피임과 동성혼 등이 다음 규제의 대상이 될 것이란 불안감까지 확산되고 있다.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는 데 ‘헌법에 임신중단 관련 언급이 없고 다른 조항으로도 보호되지 않는다’며 동원한 논리를 다른 진보적 의제들에도 적용해 ‘뒤집기’를 시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판례 파기에 찬성한 보수 성향의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보충의견을 통해 “향후 우리는 그리스월드, 로런스, 오버게펠을 포함해 앞선 판례를 모두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각각 피임과 동성애, 동성혼 등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다.

워싱턴포스트(WP)는 대법원 판결을 비판하는 많은 이들이 소수 인종과 소수 민족, 동성애자에 대한 권리의 철회를 촉발할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면서 백인과 남성에 맞서 어렵게 확대한 권리가 대법원에 의해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30년간 동성혼 상태인 에이미 마틴은 WP에 동성혼 금지가 대법원의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면서 “미국의 뼈대와 기초가 풀려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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