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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만성화된 불안’ 버텨내는 키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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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우크라이나 취재를 마치며

한겨레

지난 19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성 미하일 황금돔 수도원 앞에 전시된 러시아군 전차 위에서 어린이들이 놀고 있다. 키이우/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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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쟁’ 때문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지난 2주 동안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서 취재하며 만난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키이우에서 처음 만난 동갑내기 친구 카테르나(34)는 한국 기자들이 우크라이나에 왜 왔는지 잘 알면서도 도시의 아름다운 곳, 유서 깊은 곳들을 소개하기에 바빴다. 키이우에 머무는 내내 “아름다운 이 도시를 즐겨보라”며 메신저로 ‘꼭 가봐야 할 장소’의 링크와 사진 등을 보내왔다.

외교부로부터 2주짜리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를 받아 찾아온 키이우는 그의 말처럼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다. 30도를 넘는 6월의 뜨거운 햇볕이 도시를 채웠고, 사람들은 드니프로 강변에 몰려나와 물놀이를 했다. 해 질 녘이나 주말엔 노천카페에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중심에 있는 셰우첸코(셰프첸코) 공원도 더위를 식히려는 시민들로 붐볐다. 공원에서는 분수가 솟아올랐고 푸른 나무 밑은 시원했다. 마치 평화로운 도시인 것만 같았다.

“매일 전쟁만 생각하면 미쳐버릴지 몰라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슬픈 생각은 마음속 한구석에 넣어두고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는 거죠.” ‘키이우는 일상을 되찾은 거냐’는 질문에 통역을 도와준 디마가 답했다. ‘일상을 회복한 키이우’는 사실 어디에도 없다. 러시아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모래주머니, 강철로 만든 구조물, 여전히 총을 멘 군인들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평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도시는 ‘만성화된 불안’을 안은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중이다.

“벌써 떠나게 돼서 미안해요.” 숙소 앞, 한 구호단체 소속 봉사자가 현지 운전기사한테 건네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취재진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결국 떠난다’는 미안함과 죄책감. 우크라이나에 왔다가 떠나가는 각국의 취재진과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도시를 떠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전쟁의 폭력과 비극에 무뎌질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실제 전쟁을 다루는 전세계 언론의 기사 수는 개전 직후인 2월 말에 비해 급격히 줄었다.

“러시아가 할머니가 사는 지토미르로 미사일을 쐈어.” 25일 이른 아침 카테르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키이우 기차역에서 국경을 넘는 열차를 타고 폴란드를 향해 가던 중이었다. 이날 러시아는 키이우에서 불과 100여㎞ 떨어진 지토미르주를 향해 미사일 24발을 발사했다. “할머니는 다행이 무사하시대.” 다행이었다.

26일 오전 출국 당일 아침 또 다시 카테르나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키이우에 미사일 14발이 떨어졌어.” 러시아군이 쏜 미사일은 카테르나의 집에서 불과 6㎞ 떨어진 유치원, 민간인이 살고 있는 아파트 등지로 떨어졌다. 할 말을 잃었다.

다음 공습의 결과가 어떨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기차가 국경을 넘었는데도 스마트폰 속 시간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것을 두고 온 것만 같았다.

한겨레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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