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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이슈 '오징어 게임' 전세계 돌풍

‘기생충’ ‘오징어 게임’ 음악엔 늘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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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명문 음반사 ‘데카’와 전속 계약한 정재일

영화·드라마서 최고의 음악감독, 이번엔 ‘데카’서 음반 4장 계약

17세에 밴드 ‘긱스’ 데뷔한 신동… 10대부터 장르 넘나들며 작업

“영화의 매력인 이야기·주인공을 충실히 통역해주는 게 나의 일”

조선일보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 10대 시절부터 가요계의 신동으로 통했고, 20대부터는 영화·드라마·창극·어린이극을 거침없이 넘나들었던 전천후 음악인이다. /김연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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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모두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한국 영상물. 두 작품에는 또 하나 공통점이 있다.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정재일(40)이 음악 감독을 맡았다는 점이다. 그는 기타·베이스·건반·드럼 같은 기본 악기(?)는 물론, 인도 악기 시타르와 톱을 다리에 고정하고 활로 켜서 연주하는 ‘톱 악기’까지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만능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에게 최근 영국에서 낭보(朗報)가 날아왔다.

93년 역사의 영국 명문 음반사 데카(Decca)와 전속 계약을 맺게 된 것.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같은 전설적 음악인들이 데카를 통해서 활동했다. 초등생 때부터 말러의 교향곡을 즐겨 들은 정재일에게도 꿈의 음반사. 이 음반사에서 한국 영화음악 작곡가의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는 한국 배우·감독·촬영감독에 이어서 음악감독도 세계로 진출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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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오징어게임'과 영화 '기생충'의 음악감독 정재일이 2022년 6월 16일 서울 여의도 KBS신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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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정재일은 “드라마와 영화음악은 의뢰인(클라이언트)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사실 납품하는 개념에 가깝다”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독립 아티스트의 꿈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며 웃었다. 오는 7월 정규 음반 ‘시편(Psalms)’의 전 세계 발매를 시작으로 음반을 4장 펴낼 예정. 그는 “지금은 전통 어법과 서양의 오케스트라, 제 피아노 연주를 담은 두 번째 음반의 마감에 한참 쫓기는 중”이라며 웃었다.

정재일을 세계에서 급부상 중인 영화음악가로만 생각하면 실은 그의 절반만 이해하는 것이다. 1999년 가수 이적(보컬), 정원영(건반), 한상원(기타) 등이 모였던 수퍼 그룹 ‘긱스’의 베이스 주자로 데뷔했을 때 불과 열일곱 살이었다. 당시 음반 속지에는 정재일이 ‘베이스·기타·피아노·퍼커션·턴테이블·톱 연주·샘플링·보컬’을 맡았다고 적혀 있다. 그때부터 가요계에서는 이미 무서운 신동으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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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오징어게임'과 영화 '기생충'의 음악감독 정재일이 2022년 6월 16일 서울 여의도 KBS신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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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0대 괴물’의 출현에 주변에서 가만히 놓아둘 리 없었다. 2004년 김민기는 노래극 ‘공장의 불빛’ 리메이크를 그에게 일임했다. 원일(경기 시나위 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은 영화음악 작업을 하나씩 맡겼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에서는 피아노, ‘강원도의 힘’에서는 기타, ‘원더풀 데이즈’에서는 오케스트라 작곡·편곡까지 맡았다. 무시무시한 건 대부분 10대와 20대 초반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정재일은 “사회생활이었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만큼 까마득한 후배였는데도 진지하게 귀 기울여주시고 동료로 대해주신 선배들이야말로 제 음악 인생의 스승들”이라고 말했다.

음악만큼은 부족함도 아쉬움도 없을 것 같지만, 그는 “결코 천재가 아니었으니까 ‘천재 소년’이라는 말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도 자작곡을 직접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의 꿈은 버렸다”고 말했다. 가수 이적·박효신, 명창 안숙선 등과 작업하면서 그는 “노래만큼은 내 분야가 아니라고 여기게 됐다”고 했다. 대신에 어린이극과 창극, 드라마와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매력에 일찍부터 눈떴다. 그는 “지금 제가 하는 작업에선 반드시 제가 주인공일 필요가 없다. 영화와 드라마에는 이미 이야기와 주인공이 존재하니까. 음악은 그 매력을 충실하게 통역해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생계형 음악인’을 자처하는 그는 창작의 동력으로 언제나 마감 시간과 음주, 공부를 꼽는다. 주량은 와인 한 병 정도. 주로 작업하거나 쉴 때 혼자서 홀짝인다. 공부는 물론 음악 공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 작업을 할 때는 발칸 반도의 집시 음악 정서를 담기 위해 마케도니아와 헝가리까지 훌쩍 날아갔다. 봉 감독은 그를 두고 “지구상에서 가장 섬세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정작 정재일은 “봉 감독님이야말로 저보다 5만배는 섬세하신 분”이라며 웃었다.

정재일은 다른 아티스트보다 인터뷰 시간이 2~3배는 걸릴 만큼 말을 아끼고 속도도 느린 편. 대신에 일말의 과장도, 자랑도 섞지 않는 담백함이 있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이후의 위상 변화를 그도 실감할까. “예상치 못했던 주목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주로 작업실에 처박혀 있거나 무대 뒤에서 일하기 때문에 실감할 기회는 적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중적인 주목의 장점은 뭘까. 그는 “영화와 음악이 그만큼 더 좋아졌다는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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