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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권 쟁취뒤 돌변해 낙태 반대…美 뒤집은 그녀 파란만장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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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로 라는 가명을 쓴 노마 맥코비(왼쪽)과 그의 변호사. 2001년 찍힌 사진이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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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뒤집어놓은 ‘로 vs 웨이드’ 판례는 복잡하지만, 관련 인물을 따라가면 이해가 쉽다. 이 판례를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 24일(현지시간) 공식 폐기하면서 미 전역이 찬반 시위로 들끓고 있다. 연방대법원의 이번 결정을 요약하자면, 여성이 임신 상태를 멈출 수 있도록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더 이상 보장하지 않겠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50개 주(州)에서 임신 중단 또는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는 길이 열렸고, 실제로 보수 성향의 주들은 관련 절차를 진행 중이다. 절반이 넘는 26개 주가 실제로 임신을 중단하는 수술을 불법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낙태(abortion)이라는 표현은 주로 그에 반대하는 보수 진영에서 태아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 사용한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중시하는 진보 진영은 임신 중단 권리 또는 출산 선택권(reproductive rights)라는 표현을 쓴다. 태아의 생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전자는 찬(pro)생명(life), 여성의 선택권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후자는 찬(pro) 선택(choice)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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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볍원 이번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대. 찬반 시위로 미국 전역이 들끓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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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나온 이 판례는 그런데 왜, ‘로 vs 웨이드’라고 불릴까. ‘로’는 당시 소송의 원고 이름인 제인 로(Jane Roe)에서, ‘웨이드’는 당시 담당 검사였던 헨리 웨이드(Henry Wade)에서 유래했다. 제인 로는 가명(假名)이다. 당시 21세였던 노마 맥코비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사용했다. 맥코비는 세 번째 임신 뒤 출산을 원하지 않았으나, 그가 거주하던 텍사스 주에선 관련 수술이 불법이었다.

당시에도 이 논란은 뜨거운 감자였고, 관련 시민운동가 및 변호사들의 지원을 받은 맥코비는 소송을 제기한다. 제인 로와 헨리 웨이드는 각각 한 번씩의 패소끝에 항소를 했고, 대법원까지 올라간 이 소송은 결국 제인 로 측의 승리로 끝났다. 대법원이 여성의 출산 선택권 또는 낙태권을 보장한 것으로 NYT 등 이를 옹호하는 진영에선 “획기적(landmark)”이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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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대법원 승소 판결 직후 승리의 미소를 짓는 노마 맥코비와 그의 변호사.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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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제인 로, 즉 노마 맥코비는 세 번쨰 아이를 출산했다. 그가 소를 제기한 건 71년이었으나 항소 등 과정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맥코비는 한 번 이혼했으며, 아이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그는 출산 및 육아에 따르는 비용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담 역시 감당할 수가 없어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가 곡절 끝에 낳은 셋째 딸은 ‘로 베이비(Roe baby)’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맥코비는 결국 딸을 입양보냈고, 그 딸은 셸리 린 손튼이라는 이름으로 성장했다. 손튼은 자신의 출산에 얽힌 사연을 전혀 모르고 자라다 89년, 맥코비가 방송에 출연해 “(손튼을)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 알게 됐다. 손튼으로서는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이었던 셈이다. 그는 생모와의 만남을 계속 거부했다. 일부 매체에 따르면 맥코비는 손튼에게 ”내가 낙태를 하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 손튼은 이에 분노하며 “당신에게 감사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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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때의 노마 맥코비.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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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 맥코비는 자신이 출산권의 아이콘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1990년대 이후 낙태 반대 캠페인의 선봉에 섰고, 낙태를 금지하는 가톨릭 신자가 됐다. 그는 그러나 2017년 사망하기 전, 그가 “임종의 고백”이라고 부른 마지막 인터뷰에서 “돈을 받았기에 낙태 반대론자들에 가담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외신 기사들에 따르면 그는 성소수자 성향을 갖고 있었다고도 한다.

‘로 vs 웨이드’는 판례 주인공의 사후에도 미국을 뒤집어 놓고 있다. NYT는 25일 “우리는 로를 잃었다”며 “지금 이 기사를 읽고 있는데 분노가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우리가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칼럼을 연이어 게재했다. 반면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이번 연방대법원의 판례가 가져올 후폭풍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폭스뉴스와 같은 보수 매체들은 환영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제인 로, 혹은 노마 맥코비는 사후에도 미국 분열의 아이콘이 됐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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