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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위대한 개츠비' 표절한 호주 작가의 궤변과 유희열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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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작가 존 휴즈...'안나 카레니나' 등 표절해 발칵
노벨문학상 작가 알렉시예비치 작품과 60곳 유사
"다른 작가의 작품 의식하지 못한 채 사용해"
유희열도 "무의식중에..." 사과에도 여론은 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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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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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표절 문제를 지적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2015년 6월 23일 신경숙 작가의 표절 의혹 관련 인터뷰)

#"다른 작가의 작품 일부를 의식하지 못한 채 어떻게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2022년 6월 16일 호주 작가 존 휴즈의 표절 논란 입장문)

#"무의식중에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유사한 진행 방식으로 곡을 쓰게 되었고... 저의 순수 창작물로 생각했지만 두 곡의 유사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2022년 6월 14일 유희열의 표절 논란 입장문)

사용한 단어와 표현은 다르다. 그러나 뜻은 일맥상통하다. 표절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 직접적으로 표절했다거나 잘못했다는 표현의 반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 사과"라고 비판받았던 신경숙 작가까지 소환한 건 최근 표절 의혹으로 멍든 예술계의 현실 때문이다.

호주에선 한 유망한 소설가로 인해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용감하게도 '위대한 개츠비' '안나 카레니나' 등 고전의 일부 구절을 베끼고,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까지 표절한 존 휴즈라는 작가로 인해서다. 심지어 이 작가의 표절 작품은 올해 호주 내 저명한 문학상 시상식에 최종 후보로 낙점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엄청난 파문도 몰고 왔다.

그런데 휴즈는 '유체이탈 화법'에 버금가는 사과글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딱 7년 전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이 떠오른 순간이다. 신씨의 1996년 작 '전설'에서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우국'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문단과 대중은 충격의 도가니에 휩싸였고, 문단에선 "의식적인 표절"이라며 신씨에게 책임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그러나 정작 대중의 비난을 받은 건 사과 인터뷰였다.

국내 최고 작곡가로 불리는 유희열의 표절 논란 또한 충격적이다. 30여 년간 정상을 달려온 그가 표절 의혹이라니. 대중에 사과하는 입장문은 여론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표절에 대한 현 시대의 예술인들이 대처하는 방식은 어떨까.

'위대한 개츠비' 등 표절해 놓고 "의식하지 못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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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일간 가디언은 호주 작가 존 휴즈가 '위대한 개츠비' '안나 카레니나' 등 일부 문구를 표절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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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F. S. 피츠제럴드. 이름만 들어도 작품이 떠오르는 위대한 작가들이다. 그런데 겁도 없이 이들이 작성한 문구를 표절한 작가가 있다.

호주는 최근 한 소설책의 표절 논란으로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존 휴즈가 지난해 출간한 책 '더 도그즈(the dogs)'가 여러 명작들의 문구를 표절해 문제가 됐다. '위대한 개츠비' '안나 카레니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등 고전뿐만 아니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까지 일부 문구를 복사하듯 베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이 같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가디언은 휴즈의 소설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작품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The Unwomanly Face of War·1985)'의 2017년 영어 번역본을 비교하며 "60여 곳에서 유사한 문장이 발견됐다"고 폭로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알렉시예비치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200명 이상의 여성들을 인터뷰해 쓴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더 도그즈' 역시 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로 건너온 러시아와 이탈리아 이민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주인공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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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작가 존 휴즈가 지난해 출간한 소설 '더 도그즈(The Dogs)'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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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의 폭로는 호주 출판계를 뒤흔들었다. 휴즈의 책은 지난달 호주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인 '마일즈 프랭클린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가 하면, 올해 '빅토리아 프리미어스 문학상'과 'NSW(New South Wales) 프리미어스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라 더욱 논란이 됐다. 결국 마일즈 프랭클린 문학상 주최 측은 지난주 후보 명단에서 휴즈의 책 '더 도그즈'를 제외시켰다.

그러나 전 세계 출판계를 더 놀라게 한 건 그의 사과였다. 휴즈는 가디언에 이메일을 보내 "나는 위대한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그 어떤 작가들보다 내가 표절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더니 "나는 항상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나만의 것으로 사용해 왔다"면서 "그렇지 않은 작가는 드문데... 정도의 문제"라고 언급했다.

그는 뻔뻔하게도 영국 시인 겸 비평가 T.S. 엘리엇을 소환해 항변했다. 휴즈는 유명 고전들을 베낀 것에 "T.S. 엘리엇이 '신성한 숲(The Scared Wood·1920)'에 썼듯 '미숙한 시인은 모방하고, 성숙한 시인은 훔치고, 나쁜 시인은 자신이 취하는 것을 훼손하고, 좋은 시인은 그것을 더 나은 것으로 혹은 적어도 다른 것으로 만든다'고 했다"며 자신의 표절을 합리화하려고 애썼다.

이어 "그가 쓴 모더니즘의 위대한 중심인 '황무지(The Waste Land·1922)'는 그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위대한 단어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선집이다. 이것이 엘리엇을 표절자로 만드는가. 전혀 아닌 것 같다"고 엘리엇의 시 '황무지'까지 걸고넘어졌다. '황무지'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 단테,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을 곳곳에 인용한 장편시로, 인용 문구에는 각주를 달아 출처를 밝혔다. 그런데도 휴즈는 자신의 표절 행위를 이에 빗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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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2017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빌딩에서 열린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양심은 있었는지 알렉시예비치의 글을 표절한 것에 대해선 한 발 물러섰다. 그는 '더 도그즈'를 15년 전에 쓰기 시작했고, 2017년 영어로 번역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를 처음 읽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다른 작가의 작품 일부를 의식하지 못한 채 어떻게 직접적으로 그렇게 사용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서 "알렉시예비치와 그의 번역가에게 허락 없이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출간했던 책 '썸바디 엘스(Somebody Else)'의 서문까지 등장시켰다. 표절은 했지만 인정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기억이나 무의식과 같은 영향은 창작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여전히 불투명하게 남을 수 있다."

그러나 알렉시예비치와 번역가들은 휴즈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그런 일들은 우연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마일즈 프랭클린 문학상의 심사위원들과 대중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과는 하지만...'유체이탈 화법' 비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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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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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즈의 표절 논란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앞서 신경숙 작가의 표절 의혹은 우리 문단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인기 작가이자 스타 작가인 그가 표절 논란에 휩싸이자 해외 언론도 앞다퉈 보도할 정도였다.

대중을 더욱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그는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제가 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문장과 (제 소설인) '전설'의 문장을 여러 차례 대조해본 결과, 표절 문제를 지적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특히 뒤이어 나온 말이 사회적 공분을 샀다. 신씨는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토로했다.

문학계는 신씨의 사과에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일갈했다. 당시 한국작가회의-문화연대 긴급토론회에서 정원옥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은 신씨가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면서 표절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여전히 신씨는 표절 의혹에 진심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며 '가져다 쓰긴 했는데 표절은 아니다' 식으로 말하는 표절 의혹 작가들의 레퍼토리를 읊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토론회에 참석한 문학평론가 이명원 경희대 교수는 "신씨의 '전설'은 '우국'과의 유사성 등 때문에 '의식적인 표절'로 간주하는 게 타당하다"는 입장이었다.

반성 없는 사과는 결국 그의 복귀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씨는 지난해 3월 '엄마를 부탁해'의 아버지 버전인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들고 나왔다. 표절 논란 이후 6년 만이었다. 더 이른 복귀를 타진했지만 비판 여론에 밀렸다. 오랜 침묵 끝에 복귀한 그를 반기는 독자들도 있었지만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의 책은 출간 첫 주 반짝 인기를 모으며 1만 권이 넘게 팔렸다. 그러나 '엄마를 부탁해'가 같은 기간 약 5만 부가 나간 것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 수치였다. 표절 논란 당시 "신씨는 이런 규칙 위반 행위에 대해 문학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던 심보선 시인의 경고가 허투루 들리지 않은 이유다.

'대중음악계의 지성'도 "무의식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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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유희열. 안테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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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쇼크'로 겨우 아물었던 상처는 최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덧났다. '대한민국 대표 뮤지션' '대중음악계의 지성'으로 불리며 1990년대부터 30여 년 동안 대중음악계를 이끈 유희열로 인해서다. 결론부터 말하면 유희열과 관련된 표절 논란은 원곡자가 베푼 너른 아량으로 법적 절차 없이 무마된 분위기다. 유희열은 표절을 인정했지만 원곡자가 문제 삼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후폭풍이 거세다.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유희열의 표절 의혹이 불거졌다. 이번에 발매하려던 '생활음악' 프로젝트 음반에 담긴 '아주 사적인 밤'이 일본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쿠아(Aqua)'와 유사하다는 지적과 함께 다른 곡들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의혹이 증폭되자 14일 유희열은 입을 열었다. 그는 소속사 안테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제보를 검토한 결과 곡의 메인 테마가 충분히 유사하다는 데 동의하게 됐다"며 "충분히 살피지 못하고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드린 것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표절 자체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의 표절 인정과 사과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싸늘하기만 하다. 30여 년 동안 가요계의 중심에서 활약한 정상급 뮤지션이 표절을 인정한 것도 충격적인데, 사과의 화법이 지나치게 세련되서다. 유희열은 "긴 시간 가장 영향받고 존경하는 뮤지션이기에 무의식중에 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유사한 진행 방식으로 곡을 쓰게 되었고, 발표 당시 저의 순수 창작물로 생각했지만 두 곡의 유사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썼다. 또 '죄송하다' '잘못했다' 등 직접 표현 대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죄송한 말씀을 전한다" 등 우회적으로 기술했다.

이는 신경숙과 휴즈 식의 언어를 담고 있다. "표절 문제를 지적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거나 "다른 작가의 작품 일부를 의식하지 못한 채" "기억이나 무의식과 같은 영향은 창작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등의 표현과 닮아서다.

누리꾼들은 즉각 날 선 반응을 보였다. 한 누리꾼(jhjo****)은 "뭔가 상당히 지능적인 사과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 정도의 음악인이라면 이러면 안 된다"고 질타했다. 또 다른 누리꾼(jkdk****)은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영향은 받았지만 표절은 안 했다는 건데 구차하다"고 꼬집었다. 표절에 대한 책임을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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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열이 22일 발표한 입장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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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표절 의혹의 예술가들이 보인 모습과 대조적이란 반응도 나왔다. 신경숙도 표절 논란 이후 6년이라는 긴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 반면 유희열은 앨범 판매 의지를 보이고, 방송 출연에도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22일 뒤늦게 '생활음악' 앨범 판매를 취소한다고 밝히긴 했지만 애당초 그의 첫 번째 사과글에는 "LP 앨범 발매를 연기했고, 사카모토 측과 연락을 통해 크레딧 및 저작권 관련 문제를 정리하겠다" "LP 예약구매자 분들께는 별도 안내 드릴 예정" 등이 적혀 있다. 표절을 인정한 곡이 담긴 앨범을 판매하려 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방송 출연도 도마에 오른 상태다. 유희열은 13년간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MC로 활약했으나 이번 표절 논란으로 위태롭게 됐다. 이 와중에 21일 녹화에 정상적으로 참여한 게 화근이 된 모양새다. 이로 인해 이날 해당 프로그램 홈페이지의 시청자게시판이 들끓었고 폐쇄된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가요계는 이른바 유희열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20년 경력의 한 음반제작자는 "가요계의 정상급 뮤지션이 여러 곡에 대한 표절 의혹이 있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사과조차 여론을 설득하지 못한 듯하다"며 "좀 더 신중하고 책임의식 있는 입장 표명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한 아이돌 그룹의 연예기획사 대표는 "K팝의 위상이 높아진 상황에서 자칫 이번 표절 논란이 찬물을 끼얹을까 우려된다"며 제도적인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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