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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국정원의 양지와 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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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옹정제는 일을 많이 한 황제 중 하나로 꼽힌다. 재상이 전결하던 문서를 가져다 결재했고, 지방관의 보고에 일일이 답했다. 날마다 50~60통의 편지를 쓰느라 밤을 새웠다. 그의 좌우명은 ‘위군난(爲君難·군주가 되는 길은 어렵다)’이었다. 좌우명은 ‘자리(座)의 오른쪽(右)에 지침이 될 글을 새겨(銘)’ 놓은 것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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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학교에도 좌우명이 있다. 가훈, 교훈이다. 국가기관 중 직원에게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는 정보기관에서 ‘모토’를 쓴다. 미국 CIA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일, 정보의 중심’을, 비공식으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를 모토로 삼고 있다. 영국 MI6는 ‘언제나 비밀’, 이스라엘 모사드는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고,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린다’이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61년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초대 부장을 맡아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를 모토로 삼았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백악관 참모들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쓴 ‘익명의 열정(passion for anonymity)’이란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우리 정보가 국가에 이바지하면 그것이 바로 양지를 사는 것”이라고 했다. 모토는 한번 정하면 영원한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이조차 정권 따라 바뀐다. 김대중 정부는 ‘정보는 국력’ 이명박 정부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박근혜 정부는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문재인 정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바꿨다. 문 정부는 이 모토를 간첩 혐의로 20년간 복역한 신영복의 글씨체로 새기는 황당한 일까지 했다.

▶국정원이 24일 원훈(모토)을 다시 바꿨다. 최근 직원 설문조사를 했는데, 첫 원훈을 다시 쓰자는 의견이 절대다수였다고 한다. 원훈석도 1961년 것을 다시 설치했다. 그동안 국정원 내부에 보관했다고 한다. 한때 음지로 들어갔던 원훈석이 23년 만에 양지로 나온 것이다. 국정원이 오랜 역사를 되찾되 과거의 어두운 일탈로 돌아가지는 말았으면 한다.

▶국정원 본관 1층에는 아무 설명과 장식 없이 별만 19개가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이름 없는 별’이라고 부른다. 임무 수행 중 순직한 직원 19명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순직 경위는 물론 요원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2018년에는 별이 18개였는데 2021년엔 19개가 됐다. 음지에서 일하고 나라를 양지로 만드는 게 국정원의 존재 이유다.

[황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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