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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이슈 애니메이션 월드

달콤과 씁쓸… 예술가는 두 렌즈로 세상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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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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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터스위트

수전 케인 지음|정미나 옮김|RHK|408쪽|1만8000원

픽사 애니메이션 감독 피트 닥터는 2010년 사춘기 소녀의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을 소재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주역으로 몇 가지 감정을 놓고 고심한 끝에 ‘소심이(Fear)’를 ‘기쁨이(Joy)’와 함께 중심 캐릭터로 정했다. ‘슬픔이(Sadness)’도 고려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우는 건 꼴불견”이란 말을 듣고 자란 그에게 슬픔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 작업은 3년이 다 되도록 진척이 없었다. 극 전개상 기쁨이가 큰 교훈을 얻어야만 했지만 소심이는 기쁨이에게 가르쳐줄 게 없었다. 닥터는 그즈음 ‘업’과 ‘몬스터 주식회사’라는 두 편의 대작을 터뜨린 후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두 작품의 성공이 그저 요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실력이 부족하니 회사를 그만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슬픔과 절망이 덮쳐왔는데, 슬픔이 커져갈수록 그간 함께 일한 동료들에 대한 사랑도 새삼 사무치게 다가왔다. 그는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감정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아닐까? 소심이 대신 슬픔이를 기쁨이와 엮어줘야겠다.” 닥터는 슬픔이를 주인공으로 대본을 다시 쓴다. 이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아카데미 최우수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동시에 픽사에서 역대 최고 수익을 낸 오리지널 창작 영화 기록까지 세웠다.

내향인의 강점을 파고든 ‘콰이어트’(2012)로 8년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를 차지한 변호사 출신 작가 수전 케인이 이번엔 슬픔과 멜랑콜리의 힘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제목 ‘비터스위트(bittersweet)’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달콤 씁쓸한’. 슬픈 음악을 들을 때 치밀어오르는 시리면서도 아스라하게 행복한 감정 같은 걸 이른다. 저자는 이를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탈바꿈시키는 열의의 근원”이라며 “결국 이러한 감정을 낳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라고 풀이한다. 이를테면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대장정에 나서도록 견인한 노스탤지어 같은 것.

책에서 저자가 가장 방점을 찍는 부분은 슬픔과 창의성의 연관성이다. 연구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궁금해했다. ‘창의성은 어떤 신비로운 힘을 통해 슬픔이나 갈망과 연관되어 있는 게 아닐까?’ 창조적 혁신가를 연구한 심리학자 마빈 아이젠슈타트에 따르면 창의성이 아주 뛰어난 사람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읜 비율이 굉장히 높다. 열 살 무렵 적어도 한쪽 부모를 잃은 경우가 25%였고, 열다섯 살 무렵엔 34%, 스무 살 무렵엔 45%에 달했다. 존스홉킨스대 정신의학 교수인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은 1993년 연구에서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기분 장애를 겪는 확률이 8~10배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저자는 그렇지만 “이론이 어떻든간에 어둠을 창의성의 유일한 촉매나 최고의 촉매로 보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어둠과 빛을 동시에 거머쥐는 달콤 씁쓸함의 렌즈로 창의성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유용하다. 달콤 씁쓸함은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향한 갈망에서 비롯된다. 최악의 경우 그 갈망은 좌절되지만 최상의 경우엔 예술로 표방될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존재하도록 하는 노력으로 승화된다.”

일본의 하이쿠 대가 고바야시 잇사는 두 아들을 잃은 뒤 얻은 딸마저 천연두로 죽자 이런 시를 남겼다. “이슬의 세상은/이슬의 세상/하지만 그래도….” 저자는 이 시에서 진짜 울림을 일으키는 건 “삶이란 덧없는 것”이라는 앞 두 구절이 아니라 “하지만 그래도 나는 딸을 영원히 그리워하리라”는 마음이 담긴 마지막 구절이라 말한다. 큰 슬픔을 겪은 이에게 세상은 “훌훌 털고 나아가라” 말하지만 슬픔을 떨치고 나아가는 태도에서 적어도 예술은 싹틀 수 없다. 예술은 농익어 터져버린 슬픔의 그 어디쯤에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건 비극 그 자체가 아니라 슬프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것, 즉 씁쓸함과 달콤함의 어우러짐이기 때문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C S 루이스는 말했다.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책이나 음악들은 우리의 신뢰를 저버리기 마련이다. 아름다움은 애초에 그런 책이나 음악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이나 음악은 단지 아름다움의 전달 매개며 책이나 음악이 실제로 전해준 것은 갈망이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서답지 않게 유려하고 문학적인 문장의 책. 거기엔 하버드 로스쿨 입학 전 프린스턴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저자의 어린 시절 꿈, 작가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 담겨 있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평화로운 광경을 보다가 ‘이들에게도 언젠가 죽음이 다가오겠지’ 문득 눈물지어본 적 있는 독자들께 권한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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