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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숨] 당신의 도정을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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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강원 평창에 가서 무언가 자라고 있는 밭을 지나는 길이었다. 저게 뭐지,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아홉 살 아이가 말했다. “아빠, 저거 감자야.” 같이 걷던 아내도 감자가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경향신문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아이에게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니 얼마 전 학교에서 감자를 심었다고 했다. 그는 강릉의 작은 초등학교에 다닌다. 그뿐 아니라 원주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아내도 감자를 바로 알아보았다. 강원도에서 산 지 20여년이 되어가면서도 감자싹과 고추싹을 구분 못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듯하다.

강릉으로 이주한 지는 1년이 조금 넘었다. 바다와 가까운 조용한 동네에 산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일곱 살이 된 아이가 바다를 한 번도 못 보았다며 보고 싶다고 했고, 미안한 마음에 그날 강릉을 찾았고,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몇 번이나 바다를 찾다가 아이에게 문득 물었던 것이다. 혹시 바닷가에서 살고 싶으냐고. 그가 좋다고 했고, 아내도 좋다고 했고, 나도 그랬다.

지난달에는 아이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이 왔다. 모내기를 해야 하니 학부모들도 모두 와 주면 고맙겠다는 것이었다. 급식 지원도 아니고 환경미화도 아니고 등·하교 안전지킴이도 아니고 모내기라니. 서울 홍대입구 인근에서 태어나 계속 살았던 나에게는 실로 생소한 단어다. 사람들이 클럽 앞에 모처럼 여럿이 줄을 서 있는 것이나 보았지 논에 들어가 본 기억조차 없었다.

애초에 학교에서 관리하는 논이 있다는 것부터가 신기했다. 이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현장 활동의 일환으로 작은 논과 밭을 운영하고 닭도 꽤 키우는 듯했다.

5월 어느 날, 나는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학교 앞의 작은 논으로 들어갔다. 경력이 있는 고학년 부모들이 못줄을 잡았고 나는 아이들에게 모를 나누어 주면서 같이 심었다. 나의 아이는 몇 번 모를 심더니 손을 들고는 교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 힘든데 그만하고 싶어요.” 전교생 60여명 중 가장 처음으로 손을 든 것이 그였다.

날이 더웠던 탓인지 왠지 모를 현기증이 몰려왔다. 1학년과 2학년은 두어 줄을 심다가 나가고, 고학년들이 들어왔고, 그들은 익숙한 듯 빠르게 모를 심고 나중에는 모내기가 끝난 논의 한 자락에서 씨름을 시작했다. 논흙으로 범벅이 된 아이들은 학교 수돗가에 가서 몸을 씻었다.

아이는 내가 평생 해보지 않은 몇 가지 일을 아홉 살 인생에 벌써 경험했다. 모를 심는 일도, 감자를 알아보는 눈도 나보다 모두 빠르다. 그가 숫자를 계산하고 한글을 읽는 속도는 반에서 제일 느린 것 같다. 그러나 괜찮다. 그는 모내기를 하고 감자를 심는 멋진 학교에서 부단히 도정되어 가는 중이다. 가을이 되면 자신이 모를 심은 논에서 추수한, 도정된 쌀을 가지고 학교에서 돌아올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의 친구와 선배들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한 시절의 도정을, 그리고 인생의 여정을 응원할 뿐이다.

여담으로 쓰자면, 스무 살에 강원도의 대학에 진학했을 때,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했던 농담이 그것이었다. “급식에 감자 나왔냐.” 나는 그들에게 강원도라고 감자만 먹는 줄 아느냐고 화를 내고 싶었으나 정말로 첫 급식에 감자조림이 나왔던 것을 기억하고는 더욱 짜증이 나고 말았다. 그런 못난 한때가 있었다. 지금은 강원도에서 감자 많이 먹겠다는 말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응, 여기는 화폐가 감자야. 화폐 단위도 원이 아니라 ‘프링’이라고 해. 1프링, 2프링, 다 프링글스 들고 다닌다.” 나도 강원도에서 20여년 지내는 동안 조금은 더 도정된 사람이 된 듯하다. 사실 감자를 서울에서보다 더 먹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다음에는 아이보다 내가 먼저 감자싹을 알아보아야겠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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