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 하다 못 한 정리 끝에 닥친 이사 날에도 잠깐 고민했다. 이 양반들을 어찌 불러야 하나. 마침 대행업체 대표가 한 일꾼 부르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옳거니, 연배도 맞춤하겠다. “형님, 저 작은 장(欌) 여기로 좀 놔 주세요.” 손아래로 보이는 이는 어정쩡했다. 미안하지만 생략. “여기, 못 좀 박아 주실래요?”
호칭(呼稱·부르는 이름) 지칭(指稱·가리키는 이름) 인플레이션이 워낙 심한 탓일까. 서비스 공급자나 수요자나 부르기 마땅찮을 때가 많다. 그러니 웬만하면 사장님이요, 피 한 방울 안 나눴어도 아버지나 삼촌이다. 병원 가면 간혹 듣는 소리가 바로 ‘아버님’. 공대(恭待)는 해야겠는데 나이도 얼추 들어 보여 그러려니 싶으면서도 떠름하다. 자식 둘 다 여의지 않았건만…. 시끌벅적 음식점 역시 혈연(血緣)이 넘친다. 여성 손님은 ‘언니’ 남성은 ‘삼촌’, 일꾼 아주머니는 물론 ‘이모(姨母)’다.
그런가 하면 언론은 왜 이리 싸늘한지. 문화, 체육, 예술인 가리킬 때는 ‘씨(氏)’도 안 붙인다. 얼마 전 작고한 명(名)사회자를 인터넷 뉴스에 관행대로 ‘송해’라고 썼더니 ‘그분이 당신들 친구냐’는 나무람이 많았단다. 정치나 경제, 교육처럼 힘깨나 쓰는 쪽 사람들한테 꼬박꼬박 직함 붙이는 관행은 그럼 뭔가.
그날 부엌은 ‘여사님’이 도맡아 정리해줬는데…. 찬장으로 잘못 들어간 상자에서 ‘미라(mirra)’가 나왔다. 바싹 말라 고이 잠든 바퀴 두 마리. 명복을 빌기엔 너무 늦었군요 벌레님.
[양해원 글지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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