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30 (토)

10년 전 '샌디 훅 사건'의 재림...그래도 미국에 총기규제는 없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롭 초교 총기난사 사건으로 과거 사건 조명
12년 샌디 훅 초교·18년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대규모 총기 살인 사건마다 규제 논의됐다 흐지부지
한국일보

25일 미국 텍사스주 유밸디 롭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피해자 가족이 추모행사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걸 막을 방법은 없다"고, 이것이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유일한 나라에서 말한다.
미국 풍자 웹사이트 어니언


미국의 언론 풍자 웹사이트 '어니언'에 등장하는 유명한 기사의 제목이다. 여기서 '이것'이란 총기 난사 사건,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다. ①2014년 5월 아일라비스타 총기 난사 사건 때 처음 올라온 이 기사는 26일 텍사스주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때문에 스물한번째로 작성됐다.

반복되는 이 기사의 특징은 사건이 일어난 일시와 장소, 인명 피해 현황을 제외하면 모든 문구가 같다는 점이다. 가상의 시민을 인터뷰이로 내세워 "끔찍한 비극이지만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다"고 되풀이하면서, 총기 난사 사건에 대응하는 정치권과 언론의 무기력함을 향해 비웃음을 보내는 것이다.

한국일보

26일 미국의 풍자 웹사이트 '어니언' 메인 화면에 걸린 모든 기사가 총기 난사 사건 직후에 반복적으로 쓰이는 ''이걸 막을 방법은 없다고, '이것이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유일한 나라에서 말한다' 기사로 교체됐다. 어니언 홈페이지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실제 미국에서 끔찍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충격, 비극" 따위의 수식어를 달면서 '총기 규제'를 외치는 목소리가 거세진다. 하지만 워싱턴 정가에선 그때만 시끄러울 뿐,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샌디 훅, 또다시"

한국일보

롭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전하는 키워드는 '반복'이다. 왼쪽부터 25일자 시카고트리뷴, 마이애미헤럴드, 뉴욕포스트 1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②24일 미국 텍사스주 남부 유밸디의 롭 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최소 21명이 숨지고 1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을 접한 미국인들은 10년 전 샌디 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과 4년 전 스톤맨 더글러스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잇달아 떠올렸다. 범인이 어리다는 점, 피해자 다수가 그보다도 더 어린 학생이라는 점, 살인을 목적으로 학교에 뛰어들어 총격을 가했다는 점 등이 유사하다.

③샌디 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은 2012년 20세 남성 애덤 란자가 코네티컷주 뉴타운에 위치한 자신이 한때 재학했던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27명을 살해하고, 2명을 부상 입힌 사건이다. 란자는 집에서 모친을 살해하고 학교에서 어린이 20명과 교직원 6명 등을 총으로 살해했다.

사후 보고서에 따르면 란자는 어려서부터 정신질환을 보였으며 총기 애호가인 그의 모친으로부터 사격을 배웠다. 사건 직전에는 대규모 총기 살해 사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족과도 접촉하지 않았고, 함께 살던 모친조차 한동안 메일로만 대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의 방에 게임 공간이 있었다는 이유로 폭력적 비디오 게임이 원인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그가 가장 즐긴 게임은 '슈퍼 마리오 브러더스' 등 비폭력적인, 총기는 등장하지 않는 게임이었다.

한국일보

2012년 코네티컷주 뉴타운에서 열린 촛불 추모제에서 희생자 유족이 참가자 100여 명을 향해 감사를 표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샌디 훅 사건 직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대대적 총기 규제를 발표하며 공세에 나섰으나 전미총기협회(NRA)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공화당의 반대는 완강했다. 총기 규제 반대론자들은 앞서 언급된 란자의 '개인적 특성'을 집중 부각했다. 개인의 정신질환과 비디오게임 중독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상원에서 대표적 중도파이자 캐스팅보트로 불리는 조 맨친 민주당 의원과 팻 투미 공화당 의원은 '초당적 합의안'으로 총기를 살 때 신원과 전과 등 조회를 강화하는 법안을 내놨다. 그런데 이마저도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로 처리가 무산됐다.

상원에서 사실상 입법을 막기 위해 진행되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끝내기 위해선 의원 100명 중 60명이 동의해야 하는데 공화당 의원 46명이 이에 반대한 것이다. 총기 규제 강화는 더 이상 논의가 이어지지 못했고, 사건 1년 뒤 라이플 제조사의 수익은 오히려 크게 늘었다.

모든 대비를 다해도 학생 죽음을 못 막는데...


한국일보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총기난사 사건 이후 2018년 3월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에 참석한 생존자 에마 곤살레스(가운데)가 다른 참가 학생의 발언을 듣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④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총기난사 사건은 2018년 플로리다주 파클랜드에서 19세 남성 니콜라스 크루즈가 자신이 다니던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에 난입해 총기를 난사, 17명을 살해하고 17명을 부상 입힌 사건이다. 크루즈는 람자처럼 주변과 단절되다시피 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폭력적 행태를 향한 경고가 지속적으로 있었고, 온라인을 통해 자신을 '학교 총기난사범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의 문제점은 '대비가 있었는데도 공격을 막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앞서 총기 규제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각 학교는 자주 일어나는 총기 공격에 대응해 방어책을 마련했다. 학교에는 금속 탐지기와 무장 경비원이 배치됐고 학생들은 수시로 '대피 훈련'을 벌였다.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도 '코드 레드(총 든 사람이 활동 중)' 예비 훈련이 철저히 시행된 학교 중 하나였다. 그래도 총기 난사로 17명이 죽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사건 생존자 에마 곤살레스(현재는 X 곤살레스로 개명)와 재클린 코린 등을 중심으로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이라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학생들이 학교에서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다며 직접 총기 규제를 위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총기 난사 세대'라는 이름도 등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당 행정부는 규제에 미온적이었다. 2017년에 민주당 쪽에서 도입을 요구했지만 성사되지 않은 범프스톡(반자동소총에 부착하면 자동소총처럼 사격할 수 있게 해주는 기기) 금지 규제를 도입하는 데 그쳤다.

역시 공화당이 주도하는 플로리다 주정부는 구매자 신원 조회와 정신적 문제가 있는 이의 총기 소유 금지, 소유 연령 하한 상향 등 과거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강한 규제 조치를 도입했고 학교 보안 조치에도 추가 예산을 넣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학생들이 요구한 돌격용 소총 금지 등 광범위한 규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국·호주·뉴질랜드선 '비극적 사건' 이후 대대적 규제

한국일보

시위대가 25일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있는 전미총기협회(NRA) 본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페어팩스=AFP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함께 소환되는 것은 다른 나라의 총기규제 사례들이다.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는 대규모 총기 난사 비극 이후 강도 높은 규제를 도입했다.

영국에서는 1996년 던블레인 초등학교 체육관에 난입한 43세 남성 토머스 해밀턴이 어린이 16명과 교사 1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은 이미 자동 및 반자동 소총은 소유를 금지하는 등 일정한 규제가 있었지만 범인은 권총 네 자루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은 이 사건 후 권총의 개인 소지를 금지하고, 사냥용 총을 보유할 경우 경찰과의 면접 등을 거쳐 면허증을 발급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호주에서는 1996년 태즈메이니아섬의 관광지 포트아서에서 28세 남성 마틴 브라이언트가 관광객 등 35명을 살해하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한 지 10일 뒤 대대적인 총기규제가 발표됐다. 연발이 가능한 총기류는 개인 소유가 금지되고 총기 소유 면허는 엄격해졌다. 이때 정부가 매입한 총기 수는 60만 정에 달했다.

뉴질랜드는 2019년 남섬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 사원에서 28세 남성 브렌턴 테런트가 저지른 총기 난사 사건으로 50명이 사망한 지 엿새 만에 자동·반자동 소총의 개인 소유를 금지하는 법을 도입하고 정부가 총기 매입에 나섰다.

반면 미국에서는 샌디 훅 사건, 스톤맨 더글러스 사건 외에도 2019년 엘패소 월마트 총기난사 사건과 2017년 라스베이거스 총기난사 사건 등에서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총기 규제 논의는 번번이 시간을 질질 끌다가 좌절됐다.

이미 너무 많은 총기가 시중에 풀려 있어 이를 다시 매입하기 쉽지 않다는 현실론, 정부 치안에 대한 불신, 그리고 총기 사유의 근거가 되는 수정헌법 2조에 대한 법원의 엄격한 해석과 여론의 지지 등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