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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정은경의 ‘정치방역’? 경박한 비판으로는 얻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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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상수의 철학으로 바라보기

강희제의 불편부당한 역사관

팬데믹 대처 헌신 정은경 청장에

안철수 “정치 방역” 무조건 폄훼

강희제 “과거 장단점 모두 새겨야”

윤석열 정부 ‘잘하기 경쟁’ 나서길


한겨레

지난해 11월29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특별방역점검회의에 정은경 당시 질병관리청장이 입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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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경 초대 질병관리청장이 지난 17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맞서 우리 공동체의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밤잠을 설쳐가며 뛰어온 정 전 청장을 필두로 한 코로나 대응에 나섰던 의료진과 보건 실무자들에게 우리 공동체는 따뜻한 감사의 인사를 건네야 마땅하다.

정 전 청장은 코로나19의 전지구적 대유행이라는 팬데믹 사태를 맞이하여 우리 국민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개인사를 희생해 가며 업무를 수행해왔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20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이름이 오를 정도였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타임>에 정 청장을 소개하는 글을 보내 “정 청장의 성실성이야말로 우리에게 남겨질 가치가 있는 이야기,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코로나와 맞서고 있는 수많은 ‘정은경’들에게,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연 인류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 뒤 새 정부를 준비하던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코로나19와 관련해 문재인 정부를 향해 ‘정치 방역’을 했다고 비판했다. 동시에 안 위원장은 윤 정부가 앞으로 ‘과학적 방역’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정하게 평가해야 후대에 도움”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은 누구나 새 정부가 성공적인 방역 정책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건강을 제대로 지켜주기를 염원하며 지지를 보낸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의 전세계적 유행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맞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들 가운데서도 도시 봉쇄 등의 극한적인 조처 없이 성공적으로 코로나19에 대처했다. 이른바 ‘케이(K)-방역’이란 이름으로 세계적으로도 코로나19 대처에 성공적 사례로 꼽혀왔다. 이에 대해 ‘정치 방역’이라는 모호한 수식어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법일뿐더러, 안 전 위원장 스스로도 ‘정치 방역’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한 적이 없다.

청나라의 강희 황제에 얽힌 얘기를 들어보자. 강희 황제가 명나라 역사 편찬의 책임을 맡아 진행하면서, 역사 얘기를 담은 초고가 들어올 때마다, 편수를 맡은 한림원 학자들에게 명나라를 너무 경박하게 비판 일변도로 서술하지 말도록 강력하게 권고했다는 기록이 <청실록> 곳곳에 남아 있다.

강희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조는 우리와 시간적으로 가까워 우리가 편견을 갖기 쉬우므로 너무 경박하게 명나라의 황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편찬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나는 군주로서 그들의 단점뿐만 아니라 장점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을 비판하기는 쉬우나 자신을 비판하기는 어려우며, 과거를 피상적으로만 논의한다면 편찬한 책이 쉽게 읽힐지라도 역사서로서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명나라 때의 홍무제와 영락제는 후계자들보다 훨씬 위대하며 우리의 많은 관례는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대만 화문서국 영인본 <성조실록> 2077~2078쪽)

강희 황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진실과 거짓, 얻음과 잃어버림에 관한 공정한 논의가 있는 법인데, 어찌 그대들이 누구를 칭찬한다고 해서 그의 가치를 더할 수 있겠으며, 누구를 폄훼한다고 해서 그의 가치를 깎아내릴 수 있겠는가! 실상을 파악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성조실록> 3409쪽)

왕조 시대에 한 왕조를 대신해 들어선 새 왕조는 앞선 왕조의 타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왕조가 멸망해 마땅한 왕조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왕조의 파렴치하고 무능함을 과장해서 강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희 황제는 그런 일을 극구 못 하게 막고 전조의 장점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명나라의 멸망을 맞이한 마지막 황제인 순정제에 대해서조차 강희 황제는 “그를 ‘나라를 망하게 한 황제’라고 무지막지하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라며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리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이 없었다”고 평가했다.(<성조실록> 3410쪽)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에게 삼천 궁녀가 있었다는 식의 과거에 대한 날조 혹은 과장, 근거 없는 헐뜯기를 강희 황제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공정함과 객관성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강희 황제 때는 <사고전서>와 <강희자전> 편찬 등 불후의 문화적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조가 교체됐을 때도 이러했는데, 우리 공동체는 정권이 바뀌었을 뿐이다. ‘공정’과 ‘상식’을 국정 가치로 내걸고 있는, 윤석열 정부가 전임 정부를 깎아내리기 일색으로만 평가한다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실망하고 우려할 것이다. 앞선 정권의 공과 과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대신 무조건적으로 깎아내리기를 하려는 것은, 자신들이 앞선 정권보다 상대적으로 낫게 보이기만 하면 된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폄훼 대신 국민 위한 경쟁 어떨까

앞선 정부의 장점과 치적을 제대로 평가한 뒤, 윤석열 정부가 그보다 더 잘하겠다고 도전적으로 나서보면 어떨까?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과 탈원전 같은 정책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뒤, 윤석열 정부가 이 같은 핵심 정책들을 문재인 정부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올해 보수정권 역사상 처음 42주기 광주 5·18 기념식에 참석했다. 보수야당 국회의원 전원이 손을 맞잡고 주먹까지 흔들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 신기원을 이뤄냈다. 이 같은 파격적인 실행력을 바탕으로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성과들은 높이 평가하고, 이를 발판으로 앞선 정부보다 더 높은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한다. 이럴 때, 새 정부가 국정 운영에 성공한 뛰어난 정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수 | 연세대에서 주역 연구로 석사, 제자백가 논리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겨레> 기자를 거쳐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등을 지냈다. 제자백가 사상과 철학을 강의하고 글쓰기를 하고 있다. <아큐를 위한 변명> <한비자, 권력의 기술>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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