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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혁명·분화·욕망·상상’ 한국 팝의 역사 고고학적 탐색[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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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전 4권)

신현준·최지선·김학선 지음 | 을유문화사 | 각 488·596·768·756쪽 | 각 2만8000~3만2000원

경향신문

1983년 일본에서 공연중인 조용필 | 경향신문 자료사진


먼저 ‘한국 팝’이란 용어의 연유부터 따져보자. 각각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다룬 1·2권 초판 서문(2005년)에 그 사연이 나와 있다. 애초 기획의 잠정 제목은 ‘한국 록의 고고학’이었으나, 막상 본문을 다 쓰고 제목을 정하려니 ‘한국 팝’이 적절하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팝 저널리스트’가 한국 대중음악 상황을 ‘팝 혁명’이라 지칭했고, 이때의 ‘팝 혁명’은 이후 문화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고고학’인 이유는 이 책이 선명한 주장이나 미화, 비판보다는 담담한 기술을 추구한다는 것과 관련 있다. 그사이 ‘K팝’이란 용어가 전 세계에서 익숙해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책이 17년 전 채택한 ‘한국 팝’이란 제목은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계 상황과 미묘하게 어긋나면서도 기묘한 선견지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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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소극장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조동진 | 경향신문 자료사진


1·2권은 개정·증보판이고 1980·1990년대를 각각 다룬 3·4권은 초판이다. 1·2권의 경우 이장희 등의 인터뷰와 사진 자료가 추가됐지만, 그사이 엄격해진 저작권 관리로 일부 이미지가 빠졌다. 17년 사이 책에 실린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떴다. 이남이, 주찬권, 신해철, 서병후, 박성연, 양병집 등이다.


1960년대를 다룬 1권 부제는 ‘탄생과 혁명’, 2권 부제는 ‘절정과 분화’다. 새로 나온 3·4권을 좀 더 자세히 살피자. 1980년대의 부제는 ‘욕망의 장소’다. 1970년대까지의 대중음악 역사는 연대기적으로 다룰 수 있었지만, 1980년대 이후는 시간순이 아니라 다른 각도의 조망이 필요했다고 저자들은 밝힌다. 1980년대를 다루는 방법은 ‘장소’다. ‘여의도 가요계’ ‘신촌파’ ‘낙원동 악기 상가’ 등 장소 특정적 명명에서 음악 정체성도 일정 부분 추출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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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여의도·신촌·낙원동 시대||||1990년대는 서태지와 함께 시작된 K팝 태동기···||||1960~90년대 사회상과 대중음악 입체적 조명||||



1980년대의 시작은 당연히도 ‘여의도의 왕, 아시아의 불꽃’ 조용필이다. 대마초 파동 후 공백기를 가졌던 그는 1979년 12월 여의도로 돌아왔다. 전두환, 노태우의 쿠데타 직전이었다. 당시 여의도는 국회의사당, 증권거래소가 있는 요충지이자 주요 방송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선 장소였다. 조용필은 집중된 미디어 환경에 최적의 자질을 가진 자타 공인의 ‘대중 가수’였다. 록 ‘축복’, 댄스 ‘단발머리’, 발라드 ‘창밖의 여자’에 모두 능숙한, ‘어떤 노래도 두루 잘하는 가수’였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동시에 경이롭게 성실했던 그는 ‘킬리만자로의 표범’(1985)을 거쳐 ‘꿈’(1991)으로 화려한 도시의 삶을 차갑게 회고한다.


조용필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 못지않게 후배 음악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언더그라운드’의 조동진이다. 조동진이 일군 터전 위에 들국화, 해바라기, 시인과 촌장, 어떤 날 등이 피어났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산실이었던 라이브 카페는 1970년대 후반부터 디스코텍에 밀려 사라졌다. 그렇게 갈 곳 잃은 청년 음악인들이 모인 곳이 ‘서초동 동진이 형 집’이었다.


1990년대는 ‘상상과 우상’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시기가 오늘날 전 세계적 규모로 성장한 K팝 산업의 태동기다. 신해철, 015B, 윤상 등이 열어젖힌 세기말의 마지막 10년은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대중음악적 절정을 맞았다. 저자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무대에 대해 혹평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 MBC <특종 TV연예>의 심사위원들(작곡가 하광훈, 방송인 이상벽, 가수 전영록)이 사실 그다지 혹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시한다. 다만 ‘구시대’ 딱지가 붙은 심사위원들과 ‘신세대’인 서태지의 대결 구도가 대중에게 이 같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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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의 서태지와 아이들


1970년대의 포크 가수이자 인기 진행자였던 이수만이 ‘SM’이라는 영문 이니셜을 처음 쓴 것은 1989년 자신의 음반에서였다. 이태원의 가장 뛰어난 춤꾼이자 보컬 능력까지 있던 현진영은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하고 싶던 이수만에게 발탁됐다. 새로운 음악과 춤, 패션을 선보였던 현진영은 그러나 대마초, 필로폰 파동을 잇달아 겪으며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됐다. 이때 한 차례 풍파를 겪은 SM의 이수만은 ‘일본형 아이돌’을 키워내기로 전략을 바꿨다. 연습생 제도를 통해 반항적 청소년을 품행 방정한 청소년으로 길러냈다. 그 첫 결과물이 HOT다. SM의 영향력은 HOT나 신화의 배출에 그치지 않는다. SM 대표이사를 지낸 정해익은 이후 사이더스로 옮겨 god를 배출했다. SM에서 ‘스케줄 매니저’를 맡았던 최진열은 현진영 사건 이후 SM을 떠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매니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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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HOT |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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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음악과 사회의 관계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조잡하지만, 사회에 관심을 끊으면서 ‘음악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은 게으르다”고 말한다. 1960~1990년대 사회상을 어렵지 않은 문체로 일별하면서 당시의 대중음악 환경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역작이다. 무대 전면의 스타에만 집중하지 않고, 이면의 매니지먼트, 연주자, 저널리스트의 역할도 살핀다. 당대의 신문, 잡지 등을 통해 ‘고고학적’ 탐색을 하는 동시, 현존하는 인물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 기획을 시작한 신현준은 악화된 건강 등으로 인해 2000년대 이후 음악사에 대한 작업은 하지 않을 뜻을 밝혔지만, 다른 필자들에겐 몇 년 후 작업을 시작해달라고 미리 요청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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