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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뒤 생이별 모른 채…이응노 손녀 돌잔치 흥겹던 대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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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운명] 고암 손녀 돌잔치 화첩

한겨레

<경인아기돐잡이기념첩>의 백미로 꼽히는 월북작가 청계 정종여의 그림. 1949년 1월1일 고암 손녀의 돌을 맞아 지인들이 함께 모인 잔치 정경을 스냅사진 찍듯 포착해 담은 것으로 손녀 경인을 안은 고암을 비롯해 청강 김영기, 일관 이석호, 이건영 등 당대 굴지의 화가 지인들 모습이 보인다. 이응노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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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전인 1949년 새해 첫날, 서울 남산 기슭에서는 한국 미술사에 기억될 그림 대가들의 특별한 잔치판이 벌어졌다.

그날의 무대는 서울 남산동에 자리했던 40대 중견 화가 고암 이응노(1904~1989)의 집이었다. 고암은 작업실을 겸한 고암화방에 지인들을 불러들여 새해 벽두 돌잔치를 차렸다. 어린아이가 없어 적막했던 집이었는데, 그 전해인 1948년 벽두에 양자로 들인 아들 이문세한테서 첫 손녀 경인이 태어나는 경사가 있었다. 그리고 무사히 1년을 보낸 경인이 첫돌을 맞아, 동료 화가들과의 술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화단에서 실력파로 손꼽히는 동료 화가들이 하객으로 몰려왔다. 당대 한국화 화단 거두였던 청전 이상범의 아들 이건영(1922~?)과, 고암과 막역한 친구였던 일관 이석호(1904~1971), 당대 손꼽히는 여성 화가였던 배정례(1916~2006), 그리고 고암을 흠모했던 후배이자 청계의 죽마고우였던 운보 김기창(1913~2001), 고암의 스승 해강 김규진의 아들로 친구처럼 지낸 청강 김영기(1911~2003) 등이 잔칫상 앞에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었다. 영문을 모른 채 앳된 표정을 짓는 손녀딸 경인을 안고서 고암은 술잔을 거푸 권하며 파안대소했다.

그날 잔칫상은 취기가 돌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고암의 10년 후배인 청계 정종여가 벌떡 일어서더니 붓과 먹을 가져오게 했다. 붓을 잡은 청계는 일필휘지로 일행의 흥겨운 모습을 묘사하는 그림을 순식간에 그려냈다. 색동옷을 입고 앙증맞은 표정을 지은 손녀딸 경인과 그 아이를 안은 고암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앉은 사람들의 특징을 캐리커처처럼 정확하고 신속하게 묘사했다. 그린 사람들마다 호를 적어 누구인지도 알게 했다. 묵선으로 술상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신속하게 옮긴 뒤 엷은 담채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가로세로 32.4×20.5㎝의 아담한 돌잔치 풍경도가 완성됐다. 오늘날로 보면 기념사진과 똑같은 기록화가 그려진 셈이었다. 청계는 다 그리고 나서 ‘경인(敬仁) 돌날 1949년 1월1일 고암화방에 모여, 청계 정종여 그리다(己丑元旦 於顧庵畵房 雲集 靑谿 寫)’라고 그림 오른쪽 상단에 경위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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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의 손녀 경인의 돌잡이 기념화첩에 들어 있는 운보 김기창의 기념그림. 돌을 맞은 고암의 손녀 경인이 아장아장 기는 모습을 담백한 필치로 담고 나서 ‘경인아기돐□□ 기축새해첫날’이라고 한글로 그림 왼쪽 구석에 적었다. 이응노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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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 정종여는 전통 진경산수와 불화, 일본 남화 등을 두루 섭렵하며 당대 한국화 화단에서 가장 돋보이는 실력파로 이름을 날렸던 대가였다. 이 작품 또한 속필로 그린 작은 그림인데도 경탄할 만큼 뛰어난 세부 묘사를 보여준다. 뺨에 홍조를 띤 채 흐뭇한 표정으로 품에 안긴 손녀를 바라보는 고암과 그 곁에서 벌컥벌컥 술잔을 들이켜는 김영기, 흡족한 표정으로 음식을 즐기는 이건영, 튼실한 체구에 웃음을 머금으며 청계를 바라보는 이석호, 발개진 얼굴로 묵묵히 술자리를 지켜보는 김기창과 다소곳하게 앉아 일행들과 정담을 나누는 배정례의 모습 등이 마치 어젯밤처럼 생생하게 화폭에 펼쳐지고 있다.

고암은 잔치가 파한 뒤 청계의 그림을 포함해 축하그림을 그려준 작가 15명의 작품을 화첩으로 묶었다. ‘경인아기돐잡이기념첩’이란 제호를 써서 붙이고 집안에 가보처럼 보관했다. 김기창이 그린 천진난만한 손녀딸의 모습을 담은 <축 경인 돌날>을 비롯해 이석호가 진중하게 그린 수선화, 이건영의 거친 필력이 느껴지는 소, 박생광의 단아한 석류 바구니 채색화 등이 수록 작품들이다. 해방 뒤 고향 충남 홍성에서 올라와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민족적 회화의 새 지평을 모색하던 고암에게 그 당시는 가장 행복하고 의욕에 넘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잔치 뒤 불과 1년여 만에 터진 한국전쟁은 화첩 속 인물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해방 뒤 국내 화단에서 두각을 드러낸 차세대 삼총사였던 청계, 운보, 고암은 전쟁 뒤 남한과 북한, 유럽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청계는 서울을 점령했다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가서 북한 조선화의 거두가 되지만, 고암과 운보와는 영원히 이별한다. 고암은 1958년 프랑스로 간 뒤 동베를린 간첩단 조작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고국의 운보와는 교유가 단절된다. 고암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석호도, 아끼는 후배였던 이건영도 모두 월북하면서 청계가 그린 돌잔치 그림 속의 인물들은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청계는 1960년 남한의 4·19 혁명 뒤 북한의 한 잡지에 ‘리형에게’라는 제목으로 해방공간에서 전통회화의 장래를 고민했던 옛 ‘남조선’ 동료작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하는데, 고암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양아들 이문세가 전쟁 때 납북됐던 고암 또한 북한에 있는 아들과 만나려고 동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을 갔다가 베를린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른다. 고암은 1987년 방북해 아들을 만나지만, 돌잔치 화첩을 그려준 청계는 이미 3년 전에 세상을 떠나 상봉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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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아기돐잡이기념첩>의 표지. 이응노미술관 제공


고암의 그림 친구들이 분단과 전쟁으로 영영 헤어지기 직전의 마지막 추억을 담은 <경인아기돐잡이기념첩>은 1950년 12월, 1·4 후퇴를 앞두고 둘째 부인 박귀희가 짐 속에 각별하게 챙겨 넣고 피난을 가는 바람에 피난처인 충남 예산 수덕사 앞 수덕여관 다락방에 무사히 보존되었다. 그 뒤 장성한 손녀 경인씨가 1970년대 건네받았고, 애지중지해 보관했던 그림은 여러 경로를 거쳐 2000년 리얼리즘 작품들을 수집했던 사업가 고 청관재 조재진의 컬렉션에 포함됐다. 조재진의 부인 박경임씨의 배려로 지난 1~4월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열린 ‘안목: 청관재 이응노 컬렉션’전에서 돌잔치 그림이 모처럼 공개되면서 해방 공간에서 고암과 대가들 사이의 폭넓은 교우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전시장에 나온 청계의 돌잔치 그림엔 인간의 온기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훗날 화첩 속 화가들에게 닥친 이산의 운명을 생각하니 작품을 보는 눈길은 더욱 애잔해지기만 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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