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대법, 임금피크제 첫 위법 판단…재계 “기업 혼란 우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정년을 앞둔 직원들의 나이만을 기준으로 임금을 깎는 성과연급제(임금피크제)는 현행 고령자고용법상 차별금지 규정을 위반해 무효라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기업 다수가 고령 직원의 인건비 감축을 목적으로 제도를 운용하는 상황에서, 이번 판결로 일선의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다만 대법원은 “다른 기업이 시행 중인 임금피크제 효력은 사안 별로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합리적인 이유’만 있다면 임금피크제 운용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퇴직자 A씨(67)가 자신이 재직했던 옛 전자부품연구원(한국전자기술연구원)을 상대로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삭감했던 임금 차액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6일 밝혔다. A씨는 1991년 연구원에 입사한 뒤 2014년 명예퇴직했다. 연구원은 노조와의 합의를 통해 2009년 1월에 61세 정년은 유지한 채 55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고, A씨는 2011년부터 적용 대상이 됐다. A씨는 임금피크제로 인해 직급이 2단계, 역량등급이 49단계 강등된 수준으로 기본급을 받았다며 2014년 퇴직하면서 임금 차액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 “도입목적 타당, 불이익 심해선 안돼”

중앙일보

임금피크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연구원의 임금피크제가 임금이나 복리후생 분야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노동자를 차별하지 못하게 한 고령자고용법(4조의4)을 위반했는지 여부였다. 1심과 2심은 “고령자고용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정했다. 대법원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회사 측은 판단의 대전제인 차별금지 조항이 권고사항이라는 주장도 폈지만, 대법원은 ‘강행 규정이니 꼭 지켜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경우에도 연령 차별이라고 볼 수 없는 ‘합리적인 이유’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 조건 네 가지를 제시했다. ▶도입 목적이 타당해야 하고 ▶불이익이 너무 심하지 않아야 하며 ▶불이익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근로시간 감소 등)를 취해야 하고 ▶임금 깎은 돈이 본래 목적대로 사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의 임금피크제는 연구원의 인건비 부담 완화 등 경영 제고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라며 “55세 이상 직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임금 삭감 조치를 정당화할 만한 사유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고(연구원)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51세 이상 55세 미만 정규직 직원들의 실적 달성률이 55세 이상 정규직 직원들에 비해 떨어지는데 오히려 55세 이상 직원들의 임금만 감액됐다”고 부연했다.

대법원은 “정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정 연령 이상 근로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형태의 임금피크제 효력에 관한 판단 기준을 최초로 제시한 판결”이라고 이번 판결 의의를 전했다. 다만 “다른 기업이 시행 중인 임금피크제 효력은 개별 사안별로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고 했다. 앞으로 유사 소송이 쏟아질 수밖에 없게 됐다.

중앙일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번 판결로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일선 기업들의 입장에선 혼란이 불가피해졌다. 임금피크제는 2003년 신용보증기금이 처음 도입한 이후 2015년 모든 공공기관에 적용됐다. 일반 기업이 도입한 사례도 늘어 300인 이상 사업체 중 임금피크제를 운영하는 곳이 54.1%(2019년, 고용노동부 자료)에 이른다.

노동계는 이날 판결을 반겼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논평에서 “지금 같은 방식의 임금피크제는 지속돼서는 안 된다”며 “대법원 판결은 당연한 결과로, 적극적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어 “오늘 판결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현장의 부당한 임금피크제가 폐지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재계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추광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근로자의 고용 안정을 도모하고 기업의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많은 기업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며 “이번 판결이 산업 현장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도 “줄소송 사태와 인력 경직성 심화로 기업의 경영 부담이 가중되고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호봉제 대체할 임금체계 선진화 필요

법원이 제시한 ‘합리적인 기준’이 다소 모호한 만큼 결국 판례가 더 쌓이기 전에는 일부 혼선이 불가피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대다수 기업이 주로 나이를 기준으로 임금피크제를 운용하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이 다소 불명확해 향후 다른 소송의 결과를 봐야 ‘합리적인 이유’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임금피크제는 정년 연장이라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에 따라 도입된 임금체계의 한 형태”라면서도 “그러나 연령에 따른 차별 논란도 있는 것이 사실인 만큼 산업현장의 소모적인 논쟁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임금체계의 선진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성과나 역할과 관계없이 시간만 흐르면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는 호봉제가 임금을 둘러싼 모든 갈등의 진원”이라는 해석을 덧붙여서다.

하남현·김경미 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ha.namhyu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