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죽기 아니면 90억 벌기…살 떨리는 금융스릴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바시르 역의 김동원(왼쪽)이 어린 조직원 다르 역의 황규찬과 투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공 = 연극열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흔히 도박으로 비유되지만 정말로 '목숨을 건 도박'을 하게 된 남자가 있다. 90억원을 벌거나, 목숨을 잃거나. 두 선택지만 남은 파키스탄의 '햄릿'이 여기에 있다.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씨티은행 파키스탄 지점에 파견된 닉 브라이트. 닉을 지점장으로 오인하고 납치한 테러집단은 1000만달러를 요구하며 그를 감옥에 가둔다. 고국에서 몸값으로 300만달러만 지급되자 목숨이 위험해진 그는 거래를 제안한다. 1년 안에 1000만달러를 만들겠다고.

연극열전 시즌9의 두 번째 작품으로 막을 올린 '보이지 않는 손'은 동학개미들도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는 차트가 넘실대는 연극이다. '달나라 연속극'과 '썬샤인의 전사들' 등을 무대에 올린 '믿고 보는 젊은 연출가' 부새롬이 2013년 퓰리처상 희곡 부문을 수상한 파키스탄계 미국인 극작가 에이야드 악타의 원작을 매끄럽게 연출했다.

무대는 침대와 책상이 전부인 감옥. 닉은 옵션거래로 700만달러(90억원)를 버는 불가능한 임무를 심지어 감옥에 갇혀 노트북PC 1대만으로 해내야 한다. 돈을 벌 수 있는 무기는 정보뿐이다. 신문을 보며 한숨을 쉬던 닉에게 그를 대신해 거래하고 감시하는 바시르가 친구에게 들은 테러 계획을 귀띔해준다. 국가 지도자들이 테러로 사망하자 환율이 폭등하고 국영기업 주가는 폭락한다. 풋옵션을 미리 매수해 단숨에 큰돈을 벌자 바시르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눈을 뜬다. 혁명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돈의 맛'에 물들며 변해 가는 모습이 극의 백미다. "돈은 인민의 아편"이라던 파키스탄 무장단체 지도자 이맘 살림도 결국 세속적인 욕심에 굴복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면서 극의 후반부는 살 떨리는 금융 스릴러로 변모한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제목을 따온 이 작품에서 돈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은 등장인물 모두를 변화시킨다. 닉은 작은 방에 갇혀서도 보이지 않는 손의 힘으로 자신의 몸값을 벌고, 바시르는 혁명을 일으킬 돈을 얻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한다. 종교와 권력조차 보이지 않는 손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교훈적인 극이기도 하다. 시장에서 이기는 법을 교과서처럼 알려준다. 정보에 우위를 가져야 하고, 통화는 제왕이며, 황소와 곰은 돈을 벌지만 돼지는 도살 당한다는 금칙. 바시르가 폭탄 발언으로 시장을 교란하는 미국 대통령에게 "트럼프 개새끼"라고 욕설할 때 객석에선 웃음이 터진다.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점도, 네 배우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연기 대결도 매력이다. 목숨을 판돈으로 건 절박한 남자의 위태위태한 심리로 극을 끌고 가면서도 종교와 정치·경제적 딜레마를 작은 무대 속으로 끌어들이는 세련된 화법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김주헌과 성태준이 닉을, 김동원과 장인섭이 바시르를 연기한다. 6월 30일까지 아트원씨어터 2관.

[김슬기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