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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김용석의 언어탐방] 코즈모폴리터니즘- 함께 살아가는 삶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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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안에는 다양한 ‘우리’가 들어가 있다. 가문이라는 우리, 계층이라는 우리, 인종이라는 우리, 성별이라는 우리, 종교라는 우리, 정파, 지역, 국가라는 우리 등이 그것이다. 내가 타자를 대하는 순간 내 안에 체화되어 있는 어떤 우리가 작동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시민”이라고 대답한 디오게네스는 역설적으로 탈집단화의 정신을 설파한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말한 것이다.

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한겨레

김용석 | 철학자

새 대통령 취임사에 ‘세계시민’이라는 말이 여러번 등장했다. 귀가 솔깃했다.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인류사에서 공동체적 삶과 연관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져왔던 단어이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전세계적인 감염병이 아직 현재진행형이고, 국제 분쟁으로 인한 전지구적 정치·경제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때에, 세계시민적 연대가 다시금 인류의 중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취임식 직후 언론에 공개된 취임사를 찬찬히 다시 보니, 세계시민은 주로 호칭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래서 ‘세계 시민’이라고 띄어쓰기를 한 것 같았다. 취임사를 “국민 여러분”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세계 시민이 자유 시민으로서 연대하여”라는 구절도 있었지만, 각별히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 즉 세계시민주의를 의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언어와 연관한 오해를 계기로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코즈모폴리턴에 관해 언어탐방을 하게 됐다. 이 두 단어는 외래어다. 국어의 일부를 이루는 말이다. 국어사전에는 각각 세계시민주의와 세계시민이라고 하든가, ‘세계주의’와 ‘세계주의자’로 대체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도 돼 있다. 그럼에도 외국어 발음을 음차해서 표기하는 이유는 이 말들의 역사적 유래가 그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물음에 “코스모폴리테스”(kosmopolítes)라고 답했다. 이 말을 자구대로 옮기면 ‘우주(kósmos) 시민(polítes)’이다. 오늘날 세계시민이라고 옮겨 쓰고 있는 말의 원조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가 지구 밖 우주의 어느 곳에서 날아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세상을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는 뜻이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완벽한 탈집단화의 선언이다. 이 세상에서 국가를 비롯한 모든 집단의 배타적 구분과 차별이 없어야 함을 뜻한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을 우주에 귀속시킴으로써 영리하게도 그 이하 모든 집단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구체적으로는 모두 우주 시민이 되면 국가 간 전쟁도, 적대해야 할 외국인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늘날의 문제이기도 한 이방인을 배척할 근본적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디오게네스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즈모폴리턴 담론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마사 누스바움은 디오게네스와 그로부터 영향받은 스토아학파의 정치철학이 모든 인간의 가치를 조건 없이 곧 어디에 소속되었든 차별 없이 인정해야 함을 촉구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서구사상의 가장 근본적이고 영향력 큰 통찰 중 하나로, 현대 서구의 정치적 구상 중 쓸 만한 것들은 대부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디오게네스는 계급, 인종, 성별, 종교, 지역, 국가 등에 속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차별하고 적대시하는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판했다. 개별자로서 사람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데에 커다란 장애 요인이 없다. ‘나’는 ‘너’를 찾는다. 이는 ‘심오한’ 철학이 간혹 놓치는 지점인데, 한나 아렌트가 철학자들의 사유가 종종 ‘단독자로서의 인간’으로 환원되는 데에 불만을 표시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주체성과 타자성, 그리고 타자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태도, 즉 환대와 적대의 담론에서도 드러나는 경향이다.

단독자로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으려 한다.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아주 잘 보여준다. 두 사람이 속한 가문은 바로 ‘가문이라는 가치’ 때문에 서로 원수처럼 적대하고 싸우지만,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받아들이고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차별과 적대는 거의 공동체의 문제다. ‘나’라는 사람이 누군가를 적대하거나 환대하는 것도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의식과 관습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나’ 안에는 다양한 ‘우리’가 들어가 있다. 가문이라는 우리, 계층이라는 우리, 인종이라는 우리, 성별이라는 우리, 종교라는 우리, 정파, 지역, 국가라는 우리 등이 그것이다. 내가 타자를 대하는 순간 내 안에 체화되어 있는 어떤 우리가 작동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디오게네스는 역설적으로 탈집단화의 정신을 설파한 것이다.

“우주 시민”이라는 그의 대답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말한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일상의 구체적 경험에서도 집단의 차별, 배척, 적대를 통쾌하게 맞받아쳤다. 한 연회에서 사람들이 디오게네스를 식탁에 초대하기는커녕 마치 개에게라도 하듯이 그에게 뼈다귀를 던져주었다. 그러자 그는 개가 하듯이 한 다리를 들고 그들을 향해 오줌을 내갈겼다. 그런 연회의 참석자들은 귀족이나 부자들일 터, 그들 집단과 계층에 속하지 않은 타자에 대해 경계를 긋고 적대한 것이다. 개들은 종종 오줌으로 경계 표시를 한다. 디오게네스는 개처럼 오줌을 싸 보임으로써, 아무 때나 경계 표시를 하며 타자를 미리 배제하는 ‘개보다 못한 자들은 사실 너희 귀족들’이라고 일침을 가한 것이다.

우주적 관점은 또한 탈인간중심주의의 시발점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인간 사이의 평등한 연대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끼리만 똘똘 뭉쳐 살자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고약한 집단이 된다. 실제로 인류라는 집단은 모든 생명체의 터전인 지구를 망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우주 시민이라는 것은 다양한 생명체들 역시 우주 시민권을 갖고 있음을 전제한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을 인간의 정체성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나는 대왕이다”라고 했을 때, “나는 멍멍이다”라고 맞받아쳤다.

누스바움은 지금까지 “코즈모폴리터니즘의 가장 심각한 잘못은 다른 종과 자연환경에 대해 우리가 지고 있는 도덕적·정치적 의무를 숙고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디오게네스의 잘못이 아니다. 이런 비판은 스토아학파를 비롯해 그의 유산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한 후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인간의 어리석음에 냉소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하게 자신이 말한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말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 대해 냉소적일 자격이 없다). 디오게네스의 삶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다른 삶’의 영원한 본보기다. 그의 코즈모폴리턴 정신은 보통의 조건에서 사람들이 실천하기에는 이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인력(引力) 없이 현실의 관성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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