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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조수연 칼럼] '테라' 폐허에서 '금융 강국의 길'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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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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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상반기 세계 금융시장은 검은 백조, 회색 코뿔소, 방 안의 코끼리 등 경제학자가 경계하는 동물로 가득하다. 통화 긴축,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 원자재 가격과 물가 급등, 자산 가격 급락, 스태그플레이션, 글로벌 공급망 차질 등 그야말로 세계 금융시장은 바글바글한 동물 잔치다. 동물 비명에 ‘다른 대안이 없어(TINA)’ ’나만 기회를 놓치면 안 돼(FOMO)‘라는 저가 매수 투기 심리가 꺾이며, 나스닥은 2022년 연초 이후 27% 이상 하락해 완전히 베어마켓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5월 초 암울한 동물 농장에 검은 백조 한 마리가 더 날아들었다. 바로 테라라는 이름의 스테이블 코인이 붕괴한 사건이다.
암호화폐(또는 가상자산) 시장은 시가총액이 2021년 말 2.4조 달러에 도달하며 2020년 이후 1800%에 달하는 폭발적 상승세를 기록했다. 암호화폐는 2008년 비트코인 탄생 이후 변동성과 불법 거래로 악명이 높아 제도권 진입이 어려웠으나 지난해 테슬라의 기업 투자,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 상장, 가상자산 펀드 등장, 연기금 투자 개시 등으로 준금융 시스템 편입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높아졌다. 암호화폐의 성장 배경에는 바로 스테이블 코인이 있었다.

스테이블 코인은 교환가치를 고정해 암호화폐의 가치 변동성을 제거한 코인이다. 이를 통해 블록체인을 활용한 가상세계의 금융망에서 거래 속도와 비용의 효율성을 높이고, 탈중앙적 특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스테이블 코인은 가상자산 투자자가 변동성이 큰 암호화폐 투자에서 거래 수단의 가격 변동성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용하며 기존 암호화폐 생태계에 부족했던 화폐의 거래적 동기, 예비적 동기를 충족한다. 한편 2021년 말 암호화폐 시가총액 상위 10개 중 3개가 스테이블 코인이었고, 7위인 스테이블 코인이 바로 테라였다.

그런데 테라가 5월 13일 전후 단 며칠 만에 완벽하게 무너졌다. 붕괴 직전까지 착오 없이 1달러 가치를 유지하던 테라는 5월 21일 5.7센트를 기록했고 테라 시가총액은 5월 9일 186억 달러에서 5월 21일 약 6억 달러로 주저앉았다. 한편 테라는 루나라는 암호화폐와 재정거래(arbitrage)를 통해 1달러 가치를 유지하는 독특한 가치 안정화 구조를 가진 알고리듬 스테이블 코인이다. 테라 사태로 루나 코인의 시가총액은 4월 4일 최고 410억 달러에서 5월 21일 약 8억 달러로 쪼그라들었고 안타깝게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관심이 집중하자 최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부활시킨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 합동수사단은 제1호 사건으로 테라를 지명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암호화폐를 둘러싼 세계 금융 변화 속에 테라의 몰락은 단순하게 물리적 피해를 넘어 좀 더 중요한 경제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암호화폐는 본질에서 국가와 민간의 시뇨리지(seigniorage) 다툼이다. 시뇨리지는 명목화폐를 발행하는 국가의 이익을 말한다. 국가는 종이에 불과한 지폐에 법률로 가치를 부여하고 국민에게 교환을 강제한다. 화폐 발행의 담보는 국민이 낼 미래 세금이다. 법적 근거가 없다면 명목 지폐야말로 완벽한 돌려막기 폰지 사기의 원형에 가깝다. 1971년 미국이 달러의 금 태환을 포기한 이후 사실 주요국 화폐 가치는 정부가 법으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한편 국가를 지배하는 정치 권력은 권력 유지를 위해 과다한 지폐 발행 동기를 가진다. 이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지속하며 화폐 가치는 불안정하고 경제 취약국 또는 경제적 약자는 항상 금융위기 공포에 시달린다. 암호화폐는 명목화폐의 부조리에서 벗어나 화폐 주조·유통 권한을 민간 자율적 의사 결정에 분산하자는 정치적 운동이다. 그러나 테라의 몰락은 암호화폐 생태계의 신뢰를 붕괴하며 정부가 감독과 통제를 강화할 빌미를 주고 말았다.

또한 현실 세계가 메타버스로 디지털 전환을 진행하면서 CBDC와 함께 민간 암호화폐는 메타버스 세계의 중요한 금융 수단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뉴욕과 런던 금융시장 사례에서 보듯이 기축통화를 선점하는 것은 해당 국가에 막대한 부가가치를 약속한다. 같은 원리로 메타버스 시대 기축통화인 스테이블 코인의 주도권을 선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단 2년 만에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한국 젊은이가 개발한 스테이블 코인, 테라가 세계 시장을 석권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천재들이 다투는 수학과 물리학, 공학의 세계인 미래 금융산업에서 한국인의 가능성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골드만 삭스는 5월 16일 ’알고리듬 스테이블 코인의 경제학’이라는 보고서에서 테러의 붕괴 원인으로 SDR, 달러 등 주요 화폐와의 고정 환율 체계를 지적했다. 과거 고정 환율 제도를 채택한 국가는 고정 환율 유지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환차익을 노리는 투기 세력이 멕시코 페소 위기, 동아시아 외환위기 등을 초래했는데, 테라가 이러한 상황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5월 8일 원인을 알 수 없는 공격으로 테라의 1달러 환율이 붕괴했으나 시스템에 의해 환율이 회복하지 않자 140억 달러의 테라가 유치돼 있던 자체 저축은행 시스템(앵커 프로토콜)에서 테라 대량 인출이 발생하며 환율은 연쇄 하락했다. 시스템 붕괴 공포로 루나 가격도 폭락했다. 1998년 천재 금융과학자들이 만들었으나 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파산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처럼 테라는 급작스러운 외생변수 변동이라는 꼬리 위험을 견디지 못했다. 지난 수년간 6개의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이 이러한 외부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화폐나 타 암호화폐로 가치를 담보하는 스테이블 코인으로 전환했다.

라임, 옵티머스 등 사모펀드 사태와는 달리 스테이블 코인, 테라는 설계와 운영 프로토콜을 비트코인처럼 백서를 통해 상세하고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게다가 테라는 블록체인 시스템 참여자들이 커뮤니티에서 주요한 의사 결정을 하는 민주적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테라가 보여준 단기간의 성공은 경쟁자를 양산했을 것이고 재산상 피해를 본 사람의 많은 지적과 원망도 쏟아지고 있다. 테라 경영진에게 범죄 혐의가 있다면 당연히 명백히 규명하고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테라의 실패를 무지한 가운데 무턱대고 마녀사냥 프레임을 씌워 처벌하는 사태로 마무리하는 것보다 한국 젊은 금융공학자들이 테라가 쌓아 올린 금융 기술력을 재평가하고 분석하며, 실수를 보완하는 기회가 주어져 한국이 금융 강국으로 성장하는 초석으로 활용하기를 바란다.

조수연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경제학 석사 △하나금융투자 상무 △ 금융투자분석사 △공정한금융투자연구소장


조수연 공정한금융투자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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