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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 부끄럽다" 성명 돌리고 사임한 러시아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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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한 러시아 외교관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내 나라가 부끄럽다"는 공개 성명을 돌린 뒤 사임했다. 러시아 엘리트층 일부에서 때때로 반전 의견이 분출되긴 하지만 소수 의견에 그친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편 우크라이나 법원은 비무장 민간인 살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러시아 군인에 대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을 보면 23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 주재 러시아 외교관 보리스 본다레프(41)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성명을 40명 가량의 동료 외교관 등에게 이메일을 통해 보낸 뒤 사임했다. 성명에서 본다레프는 "외교관 생활 20년 동안 2월24일에 일어난 이 (우크라이나) 전쟁만큼 내 나라가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고 썼다. 그는 이어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아니 사실 서방 전체에 대해 일으킨 이 호전적인 전쟁은 우크라이나 시민뿐 아니라 러시아 시민들에게도 가장 심각한 범죄 행위다. 대문자 Z(러시아에서 전쟁 찬성의 의미로 사용되는 기호)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건강한 자유사회에 대한 모든 희망과 전망이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수군사작전'으로 칭하며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본다레프는 전쟁을 시작한 이들이 원하는 건 "오직 권력을 영속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권력자들이 "이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생명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수천명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이 단지 이를 위해 이미 목숨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성명에서 본다레프는 몸담았던 러시아 외무부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18년 동안 동료들의 존경을 받는 전문적이고 교육받은 지식인에서 핵무기로 세계를 위협하는 사람이 됐다"며 "오늘날 외무부는 외교를 다루지 않고, 전쟁 조장·거짓·증오로 가득차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명에서 "나는 이 피비린내 나고 어리석으며 완전히 무가치한 불명예를 더 이상 나눠질 수 없다"며 사직의 변을 밝혔다.

본다레프는 캄보디아와 몽골을 거쳐 2019년부터 제네바에 주재해 군축 관련 업무를 했다. 본다레프는 <뉴욕타임스>에 함께 군비 축소 관련 업무를 하는 다른 러시아 외교관들이 태연히 서방에 대한 핵공격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이 그를 가장 혼란스럽게 했다고 말했다. 본다레프는 "그들은 러시아가 미국의 한 마을에 핵공격을 하면 미국인들이 즉시 겁에 질려 무릎을 꿇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본다레프는 전쟁이 시작된 뒤 자신 외에도 몇몇 외교관들이 조용히 사직했다며, 비록 소수긴 하지만 자신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다만 본다레프는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이 전쟁을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데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영국 BBC 방송 등에 러시아인들이 경제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현 상황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고 있지만 선전으로 형성된 시각을 바꿀 정도는 아니라고 말했다. 러시아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가 3월말 조사해 4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정부의 주요 선전 수단으로 여겨지는 텔레비전을 뉴스의 주요 출처로 여기는 이들의 비율(70%)이 지난해 1월에 비해 6%포인트 늘었고 텔레비전에 대한 신뢰도도 10%포인트나 증가했다. 반면 러시아 정부가 제한하고 있는 소셜미디어(38%)나 온라인출판물(30%)을 통해 뉴스를 보는 비율 및 이들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뉴스의 신뢰도는 9%포인트나 감소했다.

본다레프는 "불법적인 일을 하진 않았지만, 내 안전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다"고 BBC에 덧붙였다.

러시아 엘리트층에서 공개적인 전쟁 반대 목소리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3월엔 러시아 국영방송 생방송 뉴스에 이 방송사 직원 마리나 오브샤니코바가 난입해 반전 시위를 벌였다. 올레그 틴코프 등 서방 경제 제재로 재산상 손실을 본 러시아 신흥재벌(올리가르히)들의 전쟁 비난도 이어졌다. 3월 러시아 고위 관료인 아나톨리 추바이스 지속적 발전을 위한 대국제기구 관계 대통령 특별대표가 돌연 사임하기도 했다. 추바이스는 사임 당시 특별한 메시지를 내놓진 않았지만 외신은 전쟁 시작 뒤 그가 살해당한 정권 반대파 사진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것을 두고 정권에 대한 반대의 뜻을 표명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내놨다.

엘리트뿐 아니라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연예인들도 반전 목소리에 합류하고 있다. 러시아 야권 정치인 류보프 소볼은 지난 2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밴드 키스 키스의 5천석 규모 콘서트에서 관중들이 러시아어로 "전쟁 꺼져"라는 구호를 외치는 영상을 게재했다. 미국 일간 <뉴욕포스트>는 러시아 록밴드 DDT의 보컬 유리 셰브추크가 지난 18일 우파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의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며 관객들에게 반전 연설을 한 뒤 기소됐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법원, 첫 전범재판서 러시아 하사 종신형 선고

한편 미국 CNN 방송을 보면 우크라이나 법원은 전쟁 뒤 열린 첫 전쟁범죄 재판에서 민간인을 사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러시아군 소속 바딤 시시마린(21) 하사에게 23일 종신형을 선고했다. 시시마린은 지난 2월28일 우크라이나 북동부 추파히우카 마을에서 62살의 비무장 민간인을 총으로 쏴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안드리 시니우 검사는 재판 결과가 "아직 우리 영토에 침입하지 않았지만 침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시마린은 재판에서 혐의를 인정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앞서 혐의가 "터무니없다"고 비난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정부가 시시마린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으며 그를 도울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재판을 시작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에 대한 전범 재판이 잇따를 전망이다. 이리나 베네딕토바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은 곧 재판에 회부될 40여건의 전범 사건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당국은 전쟁범죄로 추정되는 사건이 1만여 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프레시안

▲23일(현지시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며 사임한 스위스 제네바 주재 러시아 외교관 보리스 본다레프 사진.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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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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