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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폭격 검토한 케네디에… 흐루쇼프의 협상 메시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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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6]

핵전쟁 직전까지 내달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전쟁에 가장 근접한 때는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다. 대부분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지 모르나, 자칫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주변 국가들 간 핵미사일 공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을 수도 있다. 러시아가 공공연히 3차 세계대전과 핵 공격을 거론하며 위협하고, 북한에서 거침없이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을 진행하는 엄중한 시기에,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 핵 위기가 어떻게 심화되었고 또 어떻게 파국을 피할 수 있었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냉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1960년대 초, 미국과 소련 양대 진영은 극단적 대결 양상을 보였다. 1961년 미국은 눈엣가시 같은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쿠바 침략을 감행했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카스트로가 쿠바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자 이에 반대하는 망명자 수십만 명이 미국으로 탈주했는데, 미국은 이들 중 일부 인사를 지원하여 쿠바의 코치노스만(Bahía de los Cochinos·흔히 영어식으로 피그스만이라고도 함)에 상륙시킨 것이다. 군사작전은 실패로 돌아가 침공에 참여한 대원은 대개 붙잡혀 처형되었고, 양국 관계는 최악 상황으로 내몰렸다.

카스트로는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쿠바 방어를 요청했다. 다른 한편, 이즈음 미국이 이탈리아와 터키에 주피터 탄도미사일을 배치하여 소련을 위협했다. 이에 대응해 1962년 여름 흐루쇼프는 비밀리에 쿠바에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했고, 핵탄두와 미사일 부품들을 위장 반입하여 현지에서 조립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던 터라 초기에는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으나 곧 끔찍한 진실이 밝혀졌다. U-2 정찰기가 찍은 항공사진에 미사일 발사대가 확실하게 포착되었다. 플로리다에서 겨우 90마일(140㎞) 떨어진 곳에 핵미사일이 배치되어 미국 주요 지역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 비상실행위원회(EXCOMM)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 국방장관 로버트 맥너마라(Robert McNamara·1916~2009)의 회고록은 이 위원회에서 어떤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내밀한 사정을 말해 준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 같은 극단적 강경파는 당장 쿠바를 공격하여 ‘싹 쓸어버리자(totally destroy)’고 주장한 반면, 온건파는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대체로 온건파의 의견으로 기울었으나, 전쟁 가능성을 피하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소련 무기들이 더 이상 쿠바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상 봉쇄 작전을 폈다. 사실상 ‘봉쇄(blockade)’지만 전쟁 상황을 피하기 위해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당시 사용했다. 이때 미국은 18만 병력을 동원했고, 쿠바를 하루 1000번 이상 폭격하는 작전을 짜고 있었다.

압력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인 10월 26일 흐루쇼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맥너마라의 증언에 따르면 이 메시지는 만일 미국이 쿠바 공격을 중단한다고 약속하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온건한 내용이었다. 여기에 미처 답하기도 전에 두 번째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 분명 소련 내 강경파 입장이 반영된 이번 문건에서는 만일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면 소련도 바로 군사 보복을 하겠다는 강력한 위협을 담고 있었다. 온건 메시지와 강경 메시지, 이 둘 중 어느 것이 크렘린의 본심에 가깝단 말인가?

케네디 대통령은 오랜 기간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내는 동안 흐루쇼프 가족과도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토미 톰프슨에게 의견을 구했다. 톰프슨은 온건 메시지에 응하라고 조언했다.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흐루쇼프로서는 소련 국민에게 자신의 행동 덕분에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고 쿠바를 구했다고 이야기할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의 말이 옳았다. 당시 미국 여론 동향도 힘으로 밀어붙이자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케네디는 온건한 방향을 잡았다.

미국과 소련은 물밑 협상에 들어갔고 가까스로 합의에 도달했다. 흐루쇼프는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을 철거해서 소련으로 가져가고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유엔의 검증을 받겠다고 공표했다. 미국은 다시는 쿠바 침공을 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러한 표면적 내용 외에 비밀 협상 내용은 따로 있었으니, 미국이 터키에 배치했던 주피터 미사일을 철거한다는 것이었다(이탈리아에 배치한 미사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쿠바에 남아 있던 소련 폭격기들도 떠나고 미국이 ‘격리’를 완전히 해제한 11월에 가서야 모든 사태가 종결되었다.

그런데 당시 쿠바에는 핵무기가 어느 정도 배치되었을까? 그리고 쿠바는 정말로 미국에 핵미사일을 발사하려고 했을까? 1992년 1월 쿠바에 가서 카스트로를 만나 미사일 위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게 된 맥너마라는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悚然)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쿠바에는 미사일 162기와 핵탄두 90기가 있었다고 밝힌 것이다. 미국민 9000만명이 희생될 가능성이 있었다. 맥너마라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어서 통역이 제대로 옮긴 것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다음 대화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만일 미국이 쿠바를 공격했다면 카스트로는 흐루쇼프에게 핵미사일을 쏘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는가? 이에 대해 카스트로는 당시 이미 흐루쇼프와 핵미사일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답변해 주었다. 그야말로 핵전쟁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고, 파국을 피한 것은 전적으로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맥너마라의 판단이다.

당시 미국 군부의 태도도 호전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사태가 종결된 후 케네디 대통령이 군 장성들을 만난 자리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고 미사일을 제거했으니 우리가 이긴 것”이라고 말하자, 르메이 장군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가 진 겁니다. 오늘이라도 쿠바를 공격해서 완전히 파괴해 버립시다!” 아직 미국의 핵 전력이 소련보다 훨씬 우세할 때 공격해서 끝내버리자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이후 소련은 케네디 행정부 기간 중 100메가톤급 핵폭탄을 만들었고, 대기권에서 핵실험을 시도했다. 양대 강국 간 갈등은 격화되었다. 맥너마라는 자신이 국방장관으로 재임하던 7년 동안 소련과 전쟁 직전까지 간 경우가 세 차례나 되었다고 실토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한 사람이 핵미사일을 7500기 동원할 수 있고, 그 가운데 2500기는 15분 내에 발사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시절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정학자들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남중국해와 동중국 해역을 들곤 한다. 북한은 이동 발사대와 잠수함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분명 한반도는 핵전쟁 고위험 지역 중 한 곳이다. 오히려 놀라운 일은 이런 극도의 위험 상황에서 우리가 그토록 담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 활화산 위에서 춤추고 있는 게 아닐까?

[세계를 구한 페트로프]

조선일보

1983년 9월 26일,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세르푸코프15라고 하는 소련 조기 경보 시스템의 부소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자정 무렵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전광판에 빨간불이 번쩍였다. 미국 몬태나에서 미사일이 발사됐다는 신호였다. 컴퓨터 화면에 ‘발사-신뢰도 높음’이라는 신호가 떠올랐다. 이것은 미국이 핵미사일 공격을 시작했다는 의미인가?

그러나 페트로프는 다르게 판단했다. 미국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면 적어도 한 번에 1000발 이상 미사일을 발사하지 한 발만 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당장 반격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급박한 순간에 페트로프는 당직 사령에게 지금 울린 경보는 오작동이라고 말했다. 같은 일이 한 번 더 벌어졌고, 페트로프는 두 번째 경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대응했다. 나중에 경보는 실제로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원칙대로라면 소련은 미국에 핵미사일 반격을 해야만 했다.

페트로프의 직관 덕분에 소련 미사일 1만2000기는 발사되지 않았고 사망자 최다 10억명 발생도 막았다. 결과적으로 페트로프는 세계를 구했지만 그는 조기 예편당했고 연금도 못 받는 가난한 노후를 보내야 했다. 미국과 독일 시민들이 상당한 금액을 모아서 전달한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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