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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W포럼]술 대신 책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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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근에 책을 하나 냈다. <딸기 따러 가자>는 제목의 산문집이다. 제목은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의 인터뷰에서 얻었다. 돈 벌러 외지로 떠난 남자들은 소식도 없고 식구들은 굶주리고 있을 때 할머니가 새벽에 ‘딸기 따러 가자’고 한다. 그러니까 그 말은 어떻게든 살자는 매일의 결심인 셈이다. 젊은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은 인터뷰에서 자기 할머니 얘기를 하면서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의 역사를 견뎌낸 지혜를 들려주었다.

번역서나 산문집을 내면서 책이 생산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늘 좀 쑥스러워 참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용기가 생겼다.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이야기가 중요한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취중에 저지르는 실수는 이해할 만한 정황으로 참작되는 이 당당한 술 권하는 사회에서, 정성을 기울인 책 얘기를 용기 있게 해도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술 대신 책 권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말을 하려 한다.

책을 만들려면 일차적으로 저자의 글이 있어야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출판사 편집진이 세심한 눈으로 오탈자와 잘못된 정보를 고치고 디자이너는 책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표지를 정성껏 고른다. 이번 책의 표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활동하는 화가 마이클 애머리의 그림인데,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숲을 파괴하는 문제를 담고 있다. 그에게 그림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지키고자 하는 운동이라 책의 문제의식과도 맞춤이었다. 화가도 자기 그림이 이 책의 표지로 재탄생한 것에 대해 아주 기뻐했다 하니, 먼 나라의 화가와 어떤 친밀감으로 만나는 느낌이었다.

책을 읽은 분들이 더러 소감을 보내주신다. 흑백의 그림에 딸기의 생기를 표하는 붉은 점들을 찍었는데, 한 독자는 그 붉은 점이 핏빛으로 보인다며 역사 속에 스러진 분들의 희생이 담겨 있다 하여 놀랐다. 한 분이 ‘오래된 기도문처럼 정제된 문장들’이라고 말씀해주실 때는 글을 다듬고 또 다듬는 간곡한 자세를 읽는 시선에 그간의 고생이 잊히는 것 같았다. 돈은 많이 버냐고 장난스럽게 물어오는 분도 있다. 요즘 나오는 시집이나 에세이집은 대개 10000원~15000원에서 가격이 결정된다. 저작권 등 다른 비용이 붙거나 분량이 두꺼워지면 가격이 올라간다. 시집 한 권은 9000원, 내 에세이집은 14000원이 책정되었다. 책을 한 권 팔면 작가에게 5~10%의 인세가 책정되니, 나처럼 직장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작가로, 시인으로, 번역가로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우리의 무구한 전통을 짚어보면 술을 주고받는 우정과 정치에 대한 깊은 믿음은 금방 바뀔 것 같지 않다. 다만 글이 하는 일, 글을 만지는 이들, 그 노동의 무게에 대해 정치나 사회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온통 도배되는 ‘먹방’ 대신 시와 글을 논하는 ‘책방’을 더 보고 싶다. 생각해보라.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날, 한 줄 글이 숨통이 되고 바람이 되는 때가 있다. 술잔 기울이며 나눈 얘기들이 허공에 흩어질 때, 책 속 단단한 글이 오롯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견결한 사유가 차분히 깃든 지면에서 갖는 만남은 하나의 실체다. 그런데 시도, 에세이도, 논문도, 유령작가니 표절이니 온갖 모욕을 당하는 시절이다. 글의 가치를 모르는 반지성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글에 기대어 사는 이들에게 위로와 연대감을 표한다.

정은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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