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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朝鮮칼럼 The Column] ‘파친코’ 작가는 왜 ‘나만의 正義’를 경계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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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소설 등 지나친 ‘정의’ 강박

차별·혐오 막아야 하지만 종종 상업주의·전체주의 변질

참신 잃고 진부해져 더 문제… 과도한 PC가 문화 예술 망쳐

이 에피소드부터 시작해야겠다. 사석에서 들은 여성 작가의 푸념이다. 젊은 남성 편집자가 자신의 문장을 바꿨다는 것. 가난한 섬마을에서 어부의 딸로 태어난 일제강점기 주인공이 육지 사내에게 ‘시집갔다’고 표현했는데, 이를 ‘결혼했다’로 고쳤다는 것이다. PC(politically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려 때는 남자들이 장인 장모 집으로 ‘장가’를 갔고, 유교를 받아들인 조선은 반대로 여자들이 ‘시집’갔다고 설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편집자는 웃으며 이렇게 반박했다고 한다. “요즘은 여성 독자가 훨씬 많아서, 조금이라도 여성의 심기를 건드릴 것 같은 내용은 싹둑싹둑입니다.”

이런 고백도 있었다. 이번에는 젠더 감수성이 아니라 성 소수자에 대한 PC 문제다. 작년에 조선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 2관왕 소설가 윤치규씨가 최근 소설집을 냈다. 제목은 ‘러브 플랜트’. 주인공은 예외적으로 이성애자 남성이다. 지금 예외적이라고 썼다. 요즘의 문학 트렌드는 게이나 레즈비언 혹은 트랜스젠더 등 성 소수자가 핵심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왜 이성애자 남성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요즘 소설은 이성애자 남성이 드물잖아요.”

‘프로 불편러’ ‘PC충’ 등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이들을 비하하는 표현까지 나왔지만, 나는 아직 현실에서 PC의 역할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성별·연령·인종·장애·종교·성적지향·학력 등에 의한 차별과 혐오가 상존하는 게 현실이고, 이들을 위한 정치적·도덕적 실천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 예술 영역에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다양성을 배려하기 위해 시작했던 운동이 안타깝게도 문화 상업주의나 문화 전체주의로 변질하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다. 대중문화와 순수 예술의 최전선에서 새로움을 선취(先取)해야 할 의무를 지닌 작품들이 PC라는 갑옷 뒤에 숨어 참을 수 없이 진부해졌다는 점이다.

할리우드의 수퍼히어로 영화에 제작 공식이 있다는 건 이제 비밀도 아니다. 마동석이 출연한 마블 영화 ‘이터널스’에는 히어로가 10명 등장하는데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어린이 등이 각각 1인분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인종적 다양성도 필수. 자아 도취 영웅 킨고는 현실에서 인도 발리우드 배우고, 초음속 영웅 마카리는 청각 장애를 지닌 흑인이다. 최고의 펀치를 지닌 한국 배우 마동석은 말할 것도 없고. 차별과 혐오를 거부한다는 PC의 명분이야 누가 부정하겠나. 하지만 기계적 배려와 균형은 영웅들의 매력을 증발시켰고, 작품은 재미를 상실한 도덕 교과서가 되어버렸다. 인도 시장 노려 킨고 넣고, 한국 시장 때문에 마동석 캐스팅해서 찌개를 끓였는데, 영화는 괴식(怪食)이 되어버렸다는 관객의 싸늘한 비판과 함께.

이제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을 왜 제목에서 인용했는지 이야기할 때다. 그는 애플TV+ 드라마로 제작되어 전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파친코’의 원작자. 부산 영도의 딸이었던 주인공 선자가 일제강점기에 오사카·도쿄 등지로 옮겨가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4대(代)의 핏줄 서사다. 최근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행사에 참석한 작가는 이런 고백을 했다. 15년 동안 쓴 초고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썼다는 것. “미국에서 예일대를 다니던 시절, 나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따돌림당하다 자살한 일본 중학생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분노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나중에 결혼해서 일본을 찾은 뒤 재일 교포 할머니들을 직접 인터뷰하면서 깨달았다. 종전에 썼던 내 원고가 끔찍했다는걸. 너무 교훈적이고, 분노가 가득했고, 나만의 정의만 녹아 있었다.”

그는 ‘나만의 정의’라는 표현을 썼다. 인간은 잔혹하면서도 따뜻할 수 있는 이중적 존재. 일본과 미국에서 겪은 차별, 그리고 소수민족의 분노만으로 장편소설을 완성했다면 소위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 모두의 지지가 있었을까. 나는 작가가 혼자만의 정의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양쪽 독자를 모두 설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상은 악이 아니라 정의라는 명제가 있다. 악에는 죄책감이 따라오지만, 정의에는 그조차 없기 때문이다. 적절한 제어 수단이 없다. 다들 정의만 있으면 상대방에게 무슨 상처를 입혀도 된다고 생각한다. 문화 예술의 PC 강박도 마찬가지. 과도한 강박적 PC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고 문화적으로도 해롭다.

[어수웅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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