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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소 한 마리 키움서 살고 싶당께라”…오월 시민군 이정모 책·그림으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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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이해모 작가 생활사 복원

민중화가 이상호 책 삽화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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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때 시민군으로 활동하다가 5월28일 붙잡혀 군 영창으로 끌려갔던 이정모(1956~84) 열사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4년만인 1984년 세상을 스스로 마감했다. 무명의 시민군이었던 그의 삶이 동생 이해모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사무총장이 쓴 <이름 없이 죽어간 브로크공-오월 시민군 이정모의 삶>(<전라도닷컴>발간)이라는 책으로 부활했다. 민중화가 이상호(62)씨가 책 표지에 나오는 그림과 고인의 삶을 압축한 그림 9장을 그렸다. 삽화는 소를 키우며 사는 게 꿈이었던 브로크공 이정모가 시민군이 된 뒤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를 압축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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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정든 집을 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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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저 소 한 마리 키울라요.”

전남 화순군 동면 오동리에서 태어난 이정모는 초등학교 졸업 후 집에 들어가 농사짓고 소를 키우며 살고 싶었다. 아버지는 “뭔 놈의 소를 키운다고 그러냐?”고 반대했다. “소 한 마리 키움서 집에서 살고 싶당께라.” 아버지와 자주 부딪혔던 정모는 집을 나와 시멘트 기와 지붕 얹는 일과 버스 차장 등을 전전했다. 20대 들어선 정모는 화순 브로크 공장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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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형을 찾아서 광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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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1일 정모는 집에 들렀다가 어머니의 걱정을 들었다. “바로 학교 앞에서 자취하고 있는데, 군인들한테 잡혀가믄 그래도 죽는다던데….” 정모는 전남대 법대 학생이던 형 윤모씨가 걱정돼 광주에 왔지만 집을 찾을 수 없었다. 화순으로 가려던 정모는 시내를 향해 무작정 걸었다. 그러나 시내 교통이 막혀 돌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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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시민군으로 총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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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모가 광주에 온 날은 도청 앞 집단발포를 한 날이다. ‘부처님 오신 날’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의 총격으로 죽어갔다. 금남로에서만 이날 54명이 사망했다.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정모는 적십자병원 앞에서 시위대 차량에 올라탔다. 계엄군의 잔악한 학살 앞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너도나도 총을 들었다. 시민군은 차를 타고 시내를 돌며 학살을 알렸다. 주먹밥도 먹었다. 5월22일 시위대 차량을 타고 도청으로 갔다. “도청 입초 설 사람이 부족합니다.” 정모는 상활실장으로부터 카빈총 한 자루와 실탄 15발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이 계엄군의 총탄에 죽었다는데, 형이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도청 주변에 시나브로 어둠이 깔렸다. 밤하늘엔 잔별들이 가득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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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해방 광주, 오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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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이 된 정모는 5월23일 도청 앞 전일빌딩으로 배치됐다. 도청 광장 주변에는 주검과 부상자들의 흑백 사진과 실종자와 사망자의 명단과 인상 착의가 적힌 벽보가 붙었다. 군인들의 총에 죽음을 맞은 시민들은 통곡했다. 정모도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전일빌딩 경계 근무를 하던 정모는 총을 다루다 실수로 총알이 격발되기도 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전남도청 궐기대회장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정모는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가슴이 뭉클했다. 5월24일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5월25일 입초를 서던 정모는 전일빌딩 청원경찰에게 총을 반납했다. 정모 등 시민군들은 회수된 총기를 건네받아 실탄 분리 여부를 검사했다. 5월26일 사흘째 비가 내렸다. 시민들이 솥을 걸고 밥을 지어 경계 근무를 하던 시민군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광주는 해방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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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최후항쟁지 전일빌딩을 지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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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기로 한 시민군은 약 200여명. 시민군은 전남도청, 전일빌딩, 와이더블유씨에이, 계림초등학교 등지에 배치됐다. 전일빌딩에 배치된 시민군은 정모 등 13명쯤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싸우다가 죽을라요.” 정모는 잠깐 건물 밖으로 나왔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형제가 생각이 났다.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복받쳐 올랐다. 5월27일 새벽 전두환 신군부는 상무충정진압 작전에 나섰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도청에서 윤상원 등 시민군이 계엄군의 총을 맞고 숨졌다. 정모 등 전일빌딩 시민군 중 일부는 방송사 직원으로 위장해 체포를 피했다. 새벽 전일빌딩을 나온 정모는 가까운 여인숙에 투숙해 쓰러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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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상무대 영창에 갇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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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정모는 형의 안부가 궁금해 전남대 쪽으로 향했다. 옷차림을 수상하게 여긴 계엄군에 붙들린 그는 군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야. 이정모. 넌 폭도야!” 영창은 30명이 들어갈 공간에 150명 넘는 사람들을 가뒀다. 합동수사본부는 자신들이 원하는 진술과 조서를 만들려고 공갈, 협박, 회유, 고문, 구타를 일삼았다. 정모는 두번의 피의자 심문 조서를 받았다. 화장실도 2인 1조로 가야하고 용변도 문을 열어 놓은 채 보도록 하는 인권유린 상황이었다. 정모 등 수감자들에게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연계시키기 위한 질문이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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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김대중과 연계되었음을 강요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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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9일 네 번째 조사를 받았다. 맨 처음 조서 내용과 네 번 째 조서 내용은 달랐다. 계엄사는 짜인 각본에 따라 80년 5월을 김대중 내란음모로 묶어 내기 위해 온갖 고문과 협박을 가했다. 그냥 평범하게 참여한 시민군들에게조처 김대중과 연관성을 따져 물었다. 정모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서에 응했다. 전두환 정권의 입맛에 맞는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다. 10월24일 오후 1시 전교사계엄보통군법회의 판결을 받았다. 소요,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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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자유의 몸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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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동안 상무대 영창에서 갖은 고문과 구타를 당했던 정모는 막상 영창을 나서자 어디로 가야 할 지 막막했다. 영창에서 그렇게 그리웠던 화순 시골집에 초췌한 몰골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날 정모는 찬 기운을 맞으며 강변에서 잤다. 정모는 여기저기 떠돌면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폭도이자 불순분자라는 낙인이 찍힌 그에게 그 누구도 선뜻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형사들이 정모를 사찰했다. 날마다 술을 마시고 술에 의지했다. 술을 잔뜩 마시고 화순 시골집을 찾았다. 어머니는 죽은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아들을 안고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도 눈물을 훔쳤다. 정모는 두세달에 한 번씩 화순 시골집을 찾았다. 그때마다 술에 취한 채였다. 정모의 반복되는 태도에 울화가 치민 아버지가 큰소리를 냈다. 정모는 아버지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나 갈라요. 나 죽어블라니까 더 이상 찾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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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유서 한 장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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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 확 죽어불라요.”

“왜 그냐. 왜 그냐. 정모야. 왜 그러냐. 그러지 마라.”

“나 억울해서 더 이상 살기가 힘드요.”

“정모야. 왜 그냐.”

“난 폭도가 아니란 말이요”

“에미는 니 마음 다 안다. 정모야.”

어머니는 전화에 대고 오열했다. 정모는 전화를 툭 끊었다. 다음날인 12월 5일 정모는 이생에서의 삶을 마쳤다.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그는 여인숙 골방에 투숙해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미안합니다. 나는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는 유서 한장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정리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삽화 <전라도닷컴> 제공

▶ 바로가기 : “이름없이 떠난 ‘벽돌공 시민군’ 이정모 형의 삶 복원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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