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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조선인은 바퀴벌레'라던 일본인이 10억엔에 내 땅 사겠다고 한다"…재일동포 할머니가 은행원에 털어놓은 속내 [씨네프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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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이 기사에는 드라마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34]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한국은 세대론이 인기를 끄는 나라다.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 586세대, X세대, Y세대 최근의 MZ세대, 이대남, 이대녀까지 특정 세대에 이름을 붙여 분류하고 분석하려는 시도가 이어져왔다. 연령대별 특징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끊임없이 지적됨에도 세대론이 지속적으로 소비되는 데는 한국적 특성이 있을 것이다. 국권피탈, 동족상잔, 산업화, 민주화 운동까지 강렬한 역사적 체험을 한 세기 동안 응축해서 지나는 동안, 각 세대는 부모 세대, 혹은 자식 세대가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한 지점이 있다고 내면에 받아들이게 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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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김민하)는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큰 사업을 펼치는 한수(이민호)와 사랑에 빠진다.<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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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2022)는 세대 갈등의 본질과 극복 가능성을 한일 관계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드라마다. 일제강점기를 통으로 살아내며 일제의 압박을 뼈저리게 느낀 '조부모 세대'(1세대), 이에 준하는 강도로 일제의 만행을 겪었지만 일본인과의 긍정적 협업 기억도 갖고 있는 '부모 세대'(2세대), 그리고 국제화 시대에 일본과 자기 실력을 가지고 경쟁하기 시작한 '자녀 세대'(3세대)의 경험을 비교한다. 서로의 사이를 가로막는 높은 벽에 여러 번 부딪힌 '1세대'와 '3세대'는 장벽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다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생긴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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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사장인 모자수(박소희) 아들로 태어난 솔로몬(진하)은 미국에서 유학한 뒤 글로벌 금융기관에 취업한 수재다. 승진을 위해 능력을 입증해야 할 필요를 느낀 그는 대형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온다.<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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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셋이나 잃은 엄마, '대를 이을' 딸을 낳다

'파친코' 시즌1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선자부터 선자의 두 아들, 그리고 아들의 아들까지 삼대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살핀다. 스스로를 "지지리 복도 없는 년"이라고 표현하는 선자의 엄마는 선자를 낳기 전에 아들을 셋이나 잃었다. 무당을 찾아간 끝에 '대를 이을' 딸을 얻게 되는데, 그게 바로 선자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시장을 누비던 선자는 세상 물정에 밝고, 어디서나 당당하다. 일본인 순사가 동네에 출두하면 고개를 조아려야 하던 시대의 엄혹함도 선자의 해사한 미소를 가리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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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는 어떤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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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큰 사업을 펼치던 한수와 사랑에 빠진다. 그의 아이를 갖게 돼 응당 결혼을 하리라 예상했던 선자는 한수의 고백에 충격을 받는다. 바로 그는 성공을 위해 일본에서 이미 가정을 꾸렸으며, 선자와는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금전적 지원을 통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한수의 제안을 뿌리친 선자는 자신의 아이와 과거까지 모두 사랑해주는 목회자 이삭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두 사람은 일본으로 넘어가 새로운 삶을 개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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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김민하)는 목회자 이삭(스티브 노)과 결혼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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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엔에 땅 산 노부인, 10억엔에 사준다는 은행에 "안 판다"

두 가지 시간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파친코' 시즌1에서 일제강점기가 주로 선자의 시선으로 묘사된다면, 현대는 그의 손자 솔로몬을 따라가며 그려진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글로벌 금융기관에 취직한 솔로몬은 1989년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의 은행이 개발 사업을 위해 꼭 수용해야 하는 땅이 있는데, 그 땅의 주인이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승진을 위해서 자기 능력을 입증해야 할 필요가 생긴 솔로몬은 자신의 출신을 바탕으로 원주민 마음을 돌리겠다고 약속하고 지난한 설득의 과정에 발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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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진하)의 목표는 은행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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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4000엔을 지불하고 땅을 산 노부인은 은행에서 토지를 10억엔에 사준다는 데도 팔 의지가 없다. 땅을 사겠다는 일본인들이 뭔가 꿍꿍이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게 그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일본인과도 능력으로 충분히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솔로몬 입장에선 이해가 되지 않는 태도다. 자신이 서명만 하면 후세가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거래인데 일본에 대한 막연한 불신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노부인이 비합리적이라고 솔로몬은 생각한다. 이에 솔로몬은 노부인과 일제 시대에 대한 경험이 비슷한 자신의 할머니 선자를 대동해 그를 설득한다. 선자와 과거 이야기를 나누던 노부인은 마음을 열어 은행과 계약을 하는 자리에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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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와 이삭은 의지할 데 없는 일본에서 새 삶을 개척했다. 그것은 매 순간 쏟아지는 차별과 멸시를 견뎌내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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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을 바퀴벌레 취급했던 일본인인데, 네 할머니였어도 땅 팔라고 했을 거니?"

이처럼 세대에 따라 일본을 향한 감정이 달라진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핵심 갈등을 이룬다. 일제 시대를 직접 경험한 선자와 윗세대에게서 당시 시대상을 전해들은 솔로몬 사이엔 뚜렷한 간극이 존재한다. 물론 솔로몬 역시 일본 땅에서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능력으로 이들의 인정을 받는 데도 성공해봤다. 그렇기에 일본인의 행위라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노부인의 태도는 이성적이지 않다고 여긴다. 반면,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조부모 세대는 자신도 역경을 헤쳐왔다고 생각하는 손자손녀 세대에 공감하지 못한다. 선자가 솔로몬에게 "참말로 니는 니가 고생하모 살았다고 생각하는 기가?"라고 물어보는 장면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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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지간인 경희(정은채)와 선자(김민하)는 서로 기댈 곳이 돼주며 이방인의 설움을 견뎌냈다.<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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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부인과 솔로몬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 솔로몬에게 출세길을 열어줄 계약일에 은행을 찾은 노부인은 서류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한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방 한 칸 빌려주지 않던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던 노부인이 솔로몬에게 묻는다. "일본 사람들은 우릴 바퀴벌레라고 불렀지. 땅속에 다시 처박아야 한다면서. 어디 들어보자. 네 할머니가 저 히죽대는 면상들을 쳐다보며 여기 앉아 계시는데, 그 몸속에 한 맺힌 피가, 그 핏방울 하나하나가 이걸 못하게 막는다 하면, 뭐라 말씀드릴 거야? 그래도 사인하라고 하겠니?" 솔로몬은 답한다.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씀드렸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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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을 완전히 망쳐버리고 지하로 내려간 솔로몬은 자유함을 느낀다. 조부모 세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외려 소통의 가능성이 커진다.<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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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은 이 결정으로 회사 내 승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버린다. 노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솔로몬을 땅속으로 처박으려 한다. 이 결정이 솔로몬에게 미칠 영향을 은유하듯, 카메라는 고층 빌딩에서 뛰쳐나와 아래로 아래로 달려가는 솔로몬을 따라간다. 지하철에서 버스킹을 하는 밴드의 노래에 맞춰 그는 춤을 춘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고 누구보다도 격식을 차리던 그는 잠시나마 풀어진다. 자유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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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일본인과 결혼한 한수는 냉혹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그에게도 앞만 보고 달리기로 결심한 사연이 있다. 사연이 있다고 해서 무책임한 행동을 모두 용서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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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조부모 세대의 삶이 존재함을 인정했다. 자신이 직접 보지 못했을지라도 윗세대의 고통이 실재함을 인정함으로써 그는 분절돼 있던 위 아래 세대가 하나로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민 1세대의 경험이나, 사회에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 이민 3세대의 경험이나 양태만 달랐지 결국 한 맥락으로 이어짐을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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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윤여정)는 솔로몬에게 "잘사는 것보다 어떻게 잘살게 됐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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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삶의 법칙은 한 가지 "견뎌내는 것"

'파친코'는 일제강점기와 현대를 엇갈려 편집하며 재일동포 삼대의 이야기를 유려하게 엮는다. 조부모가 겪은 고생이 어떻게 손자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지, 손자가 현재 느끼는 소외감은 조부모가 일본 땅을 처음 밟을 때 체험한 막막함과 어디가 비슷하고 어디가 다른지 보여준다. 노부인의 집에 함께 찾아간 선자와 솔로몬이 그녀가 내준 쌀밥을 먹는 장면이 그렇다. 선자는 그 쌀이 한국산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리고, 과거 어머니가 일본으로 자신을 떠나보내기 전에 지어준 쌀밥의 온기를 떠올린다. 반면, 그 쌀이 한국산임을 설명해줘도 모르는 솔로몬은 할머니의 눈물에 당혹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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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반정부 활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며 선자의 인생은 또 한 번 요동치게 된다.<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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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1의 도입부와 말미에 반복되는 자막이 있다. 바로 "그들은 견뎌냈다"는 것이다. 인생의 본질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저 '견뎌내는 것'이다. 삶의 경험이 달라서 서로에게 가 닿지 못할 듯하던 삼대가 상대방과 공감할 지점을 발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을 이해하면서 가능해졌다. 내가 인생을 견뎌내고 있는 것만큼, 나의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내 자녀도 견뎌내고 있을 것임을 인정한 것이다. 각자의 경험엔 차이가 있지만, 인생을 '견뎌낸다'는 점에서 모두가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한국에서 진행 중인 세대 갈등에 접근하는 첫 단추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반대편에서 첨예하게 논쟁 중인 상대방도 그 자신의 인생을 견뎌내고 있다는 점에선 나와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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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는 애플 티비 플러스에서 볼 수 있다.<사진 제공=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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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시대극·드라마·가족
감독: 코고나다, 저스틴 전
원작 소설 저자: 이민진
출연: 윤여정, 김민하, 이민호, 진하, 정은채
평점: 왓챠피디아(4.2/5.0),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98%), 팝콘지수(95%)
※2022년 5월 20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애플 티비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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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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