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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할아버지 손 잡고 올랐던 월명공원… “한 포기 장미와 빛나는 오월의 구름을 던져 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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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와사등’의 시인 김광균

손자와 떠난 군산 여행

조선일보

대장도 대장봉에 올라 내려다보니 빛나는 오월의 구름을 가진 군산 앞바다가 보인다. 해풍에 흔들리는 바다가 이지러진 청춘 같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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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시인 김광균이 1938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와사등(瓦斯燈)’이다. 와사등은 당시 가로등으로 쓰던 가스등. 그런데 시인은 왜 이 거리가 낯설고 눈물겹다고 했을까.

1914년 개성에서 태어나 1993년 서울에서 눈을 감은 그는 가장 빛났던 청춘, 열여덟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전북 군산에서 살았다. 설야, 외인촌 등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나왔다. 당시 군산은 국내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였다. 개성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육 남매의 장남, 즉 가장이 된 그가 돈을 벌러 떠나온 곳이 군산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김광균의 손자인 김성수(48) 안디나 와인 대표다. 그래서일까. 김광균 시에는 군산의 많은 장면들이 녹아있다. 김 대표와 함께 할아버지 시의 풍경들을 찾아 군산으로 떠났다.

◇둔율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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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최초의 성당인 ‘둔율성당’. 김광균 시 ‘산상정’에 나오는 성당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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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이 겨운 하늘에서 성당의 낮 종이 굴러 내리자/ 붉은 노트를 낀 소녀 서넛이/ 새파란 꽃다발을 떨어트리며/ 햇빛이 퍼붓는 돈대 밑으로 사라지고.”

1936년 4월 발표된 ‘산상정(山上町)’이다. 산상정은 1930년대 군산에 있던 지명으로, 현재 선양동을 말한다. 그의 시 중 유일하게 군산 지명이 나오는 시다.

시 속 성당은 군산 최초의 성당 ‘둔율성당’이다. 돈대(墩臺)란 평지보다 높직하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 성당에서 걸어서 8분 거리에 있는 선양동 해돋이 공원에서 성당을 바라보면,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 성당이 눈부시게 빛난다.

연회색 인조석으로 덧댄 성당은 그냥 봐서는 오래된 것 같진 않아 보인다. 1937년 목조 성당 건물로 설립됐으나, 광복 이후에 일본군이 버리고 간 폭발물이 미군의 실수로 폭발하면서 소실됐다가 1955년 현재의 건물로 신축됐기 때문이다. 당시엔 붉은 벽돌을 마감재로 사용했으나, 나중에 인조석을 덧댔다.

김광균은 평생 무교였다. 그러나 와병 중 친했던 시인 구상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았고, 세례명은 니코데모였다고 한다. 군산 살던 시절 신자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성당은 그처럼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찾아올 만하다. 햇살 아래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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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독립서점 ‘마리서사’. 서울 종로에 있던 김광균의 단골서점을 복원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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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상징인 월명공원 수시탑. 원래 마을을 지키는 신사가 있던 곳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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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가장 번영했던 모습을 볼 수 있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부로가 건축해 ‘히로쓰 가옥’으로도 불린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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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우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구름은 보랏빛 색지 우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김광균의 시는 회화 같다. 모던하고 영상미가 있다. 이 시는 그의 이런 감각을 가장 잘 살렸다. 제목도 ‘뎃상(데생)’이다. 노을진 하늘 위로 전신주가 기울어진 곳. 군산 ‘시간 여행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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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번영했던 군산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경암동 철길마을과 군산항의 뜬다리부두(부잔교), 경성고무 공장이 있던 곳에 세워진 검정고무신 조형물.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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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건립된 신흥동 일본식 가옥을 시작으로 ‘근대역사체험공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온 ‘초원사진관’까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들로 가득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건물들이 보존돼 있어 ‘장군의 아들 시리즈’, ‘타짜’ 등이 촬영돼 ‘영화의 거리’로도 유명하다.

김광균이 살았던 1930년대 군산은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현대화되던 도시였다. 그의 시에서 현대 문명의 비애와 인간의 절대적 고독이 드러나는 이유다. 당시 군산의 화려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다. 보통은 히로쓰 가옥으로 불린다. 1925년 일제강점기 때 포목점으로 부(富)를 일군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부로가 건축한 집이기 때문이다. 이 집 주변으로 부유한 저택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하룻밤쯤 자볼 만하다.

김광균의 아버지도 개성 남대문 앞 네거리 모퉁이에서 포목 도매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열두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재산은 채권단이 가져갔다고 한다. 그는 돈을 벌러 군산으로 왔다. 그 먹먹함, 어떻게 풀었을까.

군산 명신슈퍼 여주인은 그 시절부터 이 자리에서 물건을 팔았다. 생필품과 식료품을 파는 가게 앞에서, 공장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사람들이 앉아 술과 안주를 즐겼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성수 대표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퇴근길, 여기서 술을 드셨을 것 같네요.”

인근 책방 ‘마리서사’는 시인 박인환이 1945년도에 서울 종로 3가에서 운영했던 예술 전문 서점을 복원한 것이다. 박인환은 프랑스 출신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과 책방을 뜻하는 ‘서사’를 합쳐 이름을 지었다. 시인 김광균을 비롯해, 김기림, 정지용 등 당대 문인들의 아지트로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난 발상지였다. 푸른색 청기와 책방, 간판을 본 김성수 대표가 반가운 듯 들어갔다. “마리서사는 할아버지 단골 책방이었어요. 박인환 시인 결혼식 주례도 할아버지가 보셨지요.” 책방 안에는 김광균 시인의 시집도 놓여 있었다.

◇군산항

“바다에는 지나가는 기선이 하~얀 향수(鄕愁)를 뿜고/갈매기는 손수건을 흔들며/…/흘러가는 SEA BREEZE(해풍)의 날개 위에/이지러진 청춘의 가을을 띄워 보낸다.”

김광균이 1937년 발표한 ‘해풍(SEA BREEZE)’이다. 김광균이 살던 1930년대 군산항은 전국 3대 항구였을 뿐 아니라 국제항이었다. 일본과 중국까지 오가는 배들로 항구가 채워져 있었다. 그 역시 개성에서 배를 타고 군산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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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젊은 층이 데이트하는 은파호수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산타로사’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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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군산항은 매우 역동적이었다. 평야와 항구, 산업단지를 모두 끼고 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당시의 영광은 군산 내항 곳곳에 남아있다. ‘뜬다리 부두(부잔교)’가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에 간조와 만조의 수위 변화와 무관하게 대형 선박을 접안시키기 위해 조성한 시설. 그 시절 이런 장치라니.

당시 항구 주변 건물들도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근대 이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옛 군산 세관은 카페 ‘정담(情談)’으로 운영 중이다. 밀수품 보관 창고가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1922년 신축한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근대건축관’으로, 일제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은 ‘근대미술관’으로 운영 중이다.

군산항은 원래 군산역과 연결돼 있었다. “가로수에는 유리빛 황혼이 서려 있고/ 철도에 흩어진 저녁 등불이/ 창백한 꽃다발같이 곱기도 하다.” 김광균이 1937년 발표한 ‘가로수’다. 그가 들었던 기차 소리, 그러나 이제는 들을 수 없다. 옛 군산역과 그 역사(驛舍)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철길은 남아 ‘경암동 철길 마을’이라는 관광지로 운영 중이다.

그 당시 교복을 대여받아 입고 쫀드기 같은 옛날 과자를 사먹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이곳에서 옛날 사진을 팔던 한 60대 상인이 말했다. “이 동네가 군산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야. 이북에서 온 피란민 동네지. 철길 옆은 철도청 땅이니깐, 남의 땅은 아니니깐, 불법으로 건물 짓고 산 거지. 할아버지가 경성고무 다니셨다고? 우리 고모도 경성고무 다녔는데!”

경성고무는 군산 근대화의 상징물과 같은 회사였다. 고무신 하나로 전국적인 기업으로 성장, 약 60년 동안 지역과 애환을 같이한 향토 기업이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회사가 사라진 공간에는 현대세솔아파트가 우뚝 서 있다. 미원광장에 있는 3.5m 높이의 ‘검정 고무신 조형물’ 만이 이곳이 고무신 공장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광균도 경성고무에서 사원으로 일했다. 서울 이북에서는 삼천리표 고무신이 인기였지만 한강 이남의 고무신은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최고였다.

◇월명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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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에 빛나는 은모래 같은 월명 공원의 월명 호수. 화려한 꽃밭 같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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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오늘날이 흐리고/ 바닷바람이 황진을 실어다 거리를 덮고 있다/ 어린 손자의 손목을 이끌고/ 월명공원에 올라/ 저기가 옛날에 할아버지 살던 곳이라고.”

김광균이 1986년 3월 22일 발표한 시 ‘황진(黃塵)’이다. 당시 김성수 대표는 열두 살이었다고 했다. 그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올라간 월명공원은 군산의 중심이다. 봄이면 화려한 벚꽃과 동백꽃으로 뒤덮인다. 정상에 오르면 금강과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월명공원에 ‘공원(公園)’이 붙여진 시기는 1906년. ‘각국 공원’이란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1972년 월명공원으로 바뀌었다. 면적은 약 260만㎡에 달하고 산책로 길이도 12km나 되는 거대한 공원이다.

대표적인 산책길은 월명호수. 김광균 시인이 1937년 발표한 시 ‘성호부근(星湖附近)’에는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온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서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월명공원의 핵심은 수시탑이다. 타오르는 불꽃과 바람에 나부끼는 돛의 형상을 띤 이곳에 오르면 멀리 앞바다와 금강 하굿둑, 그리고 군산 시가지와 장항제련소, 금란도 등의 주변 전경이 보인다. 1966년 세운 수호탑으로 원래는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보는 군산 앞바다 전경도 멋지지만, 조금 아쉽다면 군산 사람들은 인근 ‘고군산군도’를 추천한다. 군산 남서쪽 35km 지점에 위치한 이곳 대장봉에서 내려다본 군산은 절경이다. 사계 모두 아름답지만, 특히 봄이 가장 아름답다. 김광균은 군산의 5월에 대해 1935년 발표한 시 ‘석고(石膏)의 기억’에서 이렇게 썼다.

“자금빛 향수 위에 그렇게 화려한 날개를 피던/ 지금 나의 망막 위에 시들은 청춘의 화환이여/ 나는 낡은 애무의 두 손을 벌려 너를 껴안고/ 싸늘히 식어진 네 가슴 위에/ 한 포기 장미와 빛나는 오월의 구름을 던져 주련다.”

[군산=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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