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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밥 사먹기도 어렵네” 무인주문 강의 듣는 어르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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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코로나가 키운 고령층 디지털 격차

비용 절감 위해 업체들 잇단 도입

디지털 문화 못 따라가는 어르신

‘디지털 배움터’ 전국에 100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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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후 서울 구로구 스마트구로홍보관에서 열린 ‘디지털 배움터’ 무인 키오스크 활용 교육에 참석한 임경희 씨가 메뉴를 살피고 있다. 이날 임 씨는 강사의 지도에 따라 차분하게 버튼을 누른 끝에 키오스크로 도시락을 주문했다. 디지털 배움터는 정보 격차를 줄이기 위해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 활용법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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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키오스크로 주문할 줄 몰라서 식당을 그냥 나갔대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디지털 디바이드(정보 격차)’가 심화되면서 고령자 등을 대상으로 디지털 기기 사용법을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곳이 주목받고 있다.》

‘디지털 걸음마’ 떼는 노인들

16일 오후 3시경 서울 구로구 스마트구로홍보관. 교육용 무인 키오스크 앞에서 도시락 두 개를 주문하던 임경희 씨(76)의 손이 멈칫했다. 메뉴와 수량까지는 어찌어찌 선택했는데, 사이드 메뉴를 추가하는 버튼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옵션 메뉴가 어디에 있을까요? 천천히 찾아보세요.” 디지털 서포터스 장정희 씨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10초가 지난 뒤 임 씨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이드 메뉴를 고르고 결제 버튼까지 누르는 데 성공한 그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임 씨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이날 서울시가 마련한 ‘디지털 배움터’ 강의에 왔다고 했다. “KTX를 탈 때도 키오스크와 스마트폰을 이용해야 하고, 이제는 로봇이 밥을 갖다 주는 식당도 생겨나는데 나도 배워야 살지 않겠어요?”

임 씨는 그동안 키오스크가 있는 식당에서 주문할 때면 진땀이 났다. 뒤에 다른 손님들이 줄을 서 있으면 빨리 주문을 마쳐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에서 컴퓨터로 성경 구절을 입력하는 일을 맡고 있는데도 키오스크만은 쓰기가 늘 어려웠다”며 “이런 걸 가르쳐주는 수업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날 함께 수업을 들은 한윤혜 씨(62)도 키오스크 주문에 성공했다. 한 씨도 그동안 키오스크만 보면 늘 버벅대곤 했다. “카드를 넣고 뭘 눌러야 하는지 몰라서 한참 보다 보면 화면이 처음부터 시작되더라고요.” 지금까지 대면 결제를 하기 위해 직원을 찾거나 아들에게 대신 음식 주문을 부탁했다는 한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눌러보니 자신감이 생겼다”면서 “집에 가는 길에 키오스크가 있는 식당에 들러보겠다”고 말했다.

이날 디지털 배움터 교육생 7명은 휴대전화로도 키오스크를 체험했다. 모두가 키오스크 주문 과정이 재현된 교육용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앱)을 깔기까지 10분이 넘게 걸렸지만 아무도 포기하지 않았다. 앱을 통해 패스트푸드 주문, 주민등록등본 발급 등을 체험하는 교육생들의 얼굴이 진지했다. “결제하기를 왜 두 번 눌러야 해요?” “로딩이 너무 오래 걸려요” 등 질문이 빗발쳤다. 이날 수업을 진행한 서포터스 장 씨는 “어르신 모두가 따라 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차근차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 코로나19가 키운 ‘디지털 디바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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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이 같은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한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디지털 기기 사용이 급증한 결과 ‘디지털 디바이드(정보 격차)’ 문제도 심화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서울디지털재단이 최근 서울 시민 5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서울시민 디지털 역량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시민의 디지털 기술이용 평균 수준을 100점이라고 할 때 장년층과 고령자를 포함한 55세 이상은 67.2점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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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별로 △뉴스 및 정보 검색(88점) △교통정보·길찾기(81점) 등은 평균 수준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배달음식 주문(59점) △예매 예약(58점) △공공서비스 이용(58점) 등에서 격차가 벌어졌다. 재단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비대면 서비스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디지털 활용이 서툰 고령자 등의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 급증한 무인 키오스크 이용이 어렵다는 이가 적지 않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영화관, 대형마트, 요식업 등 민간에서 사용되는 키오스크는 2019년 8587대에서 지난해 2만6574대로 3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60대 남성 A 씨는 3분 넘게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마치지 못했다. 오른쪽 밑에 있는 ‘주문’을 눌러야 했지만 햄버거가 그려진 이미지를 되풀이해 눌렀기 때문이다. 해당 이미지를 아무리 눌러도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A 씨는 “젊은이들은 몇 초면 해내는 일을 가지고 헤매다 보니 이제는 ‘나도 늙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며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기도 꺼려진다”고 했다.

20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김은숙 씨(58)는 몇 년 전 키오스크로 음식을 주문하려다가 뒷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빨리 좀 하지….”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은 김 씨는 “음식을 선택하는 버튼의 위치가 제각각이라 시간이 좀 걸렸던 건데 그렇게 속닥대는 말을 듣자 주눅이 들었다”고 했다.

서울디지털재단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무인 키오스크 사용 경험이 적었다. 55세 미만 응답자의 94.1%가 키오스크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반면에 55∼64세는 68.9%만 이용해본 것으로 나타났다. 65∼74세는 29.4%, 75세 이상은 13.8%로 이용 비율이 급격히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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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스크를 쓰지 않는 이유로는 ‘사용 방법을 모르거나 어려워서’가 33.8%로 가장 많았다. 이어 △필요가 없어서(29.4%) △뒷사람 눈치가 보여서(17.8%)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대한 거부감(12.3%) 순이었다.

점포의 무인화 바람은 앞으로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돼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특히 유통업계를 중심으로 무인 키오스크가 널리 보급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키오스크를 여러 대 두면 매장 회전율이 빨라져 효율이 좋다”고 했다.

홀에 상주 직원이 없는 매장도 잇달아 생겨나고 있다. 롯데리아는 지난해 12월 주문부터 픽업까지 모두 비대면으로 처리하는 스마트 특화 매장 ‘L7홍대점’을 열었다. 주문은 키오스크로 하고, 무인 픽업대에서 메뉴를 꺼내 가는 방식이다. “재미있다”라는 반응과 함께 “처음 본 어르신이라면 사용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롯데리아 관계자는 “키오스크의 직원 호출 버튼을 누르면 주방에 있던 직원이 나와 응대한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아이스크림, 샌드위치, 밀키트, 반찬가게 등 다양한 종류의 무인점포가 증가하는 추세다.
○ 디지털 교육이 삶에 변화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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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배움터는 이 같은 상황을 맞아 키오스크,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 활용법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과기정통부가 2020년부터 전국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사업을 벌이고 있다. 복지관, 주민센터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지난해 전국적으로 1000여 개의 디지털배움터가 운영돼 서울에서만 7만4000명이 수업을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난해는 코로나19 사태 탓에 거의 줌(ZOOM)으로만 수업을 했는데, 올해부터 대면수업을 많이 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는 영화관 같은 곳에 어르신을 모시고 가는 현장 수업도 해보려 한다”고 설명했다.

디지털 교육이 수강생의 삶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2019년부터 서울디지털재단에서 ‘어디나 지원단’ 디지털 강사로 일하고 있는 상희원 씨(58)는 그런 모습을 자주 봐 왔다. 어디나 지원단은 55세 이상이 강사가 돼 중장년층과 고령자에게 디지털 기기 사용법을 가르치는 서울시 프로그램이다. 3년간 강사 350명이 수강생 1만970명을 교육했다. 상 씨는 “어르신들이 자식들에게 부탁하기 미안해 누리지 못하는 생활이 많다”며 “남편과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던 어르신이 몇 번의 연습 끝에 영화 티켓 예매에 성공하는 것을 보고 나까지 뿌듯했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에 사는 70대 남성 B 씨는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 가기 위해 늘 창구를 미리 방문해 기차표를 예매했다. 그러나 지난해 강의를 듣고 기차표 예매 앱 사용법을 배운 뒤 불필요한 발걸음을 줄일 수 있었다.

김은숙 씨도 지난해 디지털 배움터에서 스마트폰과 키오스크 강의를 두루 수강했다. 김 씨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할 줄 아는 것이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자존감이 올라갔다”고 말했다. 그는 6월부터 자신처럼 기기 사용을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스마트폰과 키오스크 사용법을 가르치는 ‘스마트 코디네이터’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인건비 절감을 고려하면서 앞으로도 무인 키오스크를 비롯한 디지털 전환은 더욱 빨라질 것”이라며 “지자체는 물론이고 기업도 소비자 디지털 교육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기술은 이제 기본권” 키오스크 설계 때부터 취약층 고려해야

“단말기 아래 휠체어 공간 필요”
공공단말기 지침 마련됐지만, 세부 업종 맞춘 규정은 따로 없어
불평등 줄일 법적 장치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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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배움터’ 수강생이 휴대전화로 배움터 홈페이지를 살피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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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키오스크의 디자인이 처음부터 정보 취약 계층을 고려해 설계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 키오스크에 적용되는 공통 지침에는 국가표준인 ‘무인 정보단말기 접근성 지침’이 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이 2016년 만든 ‘공공단말기 접근성 지침’을 올해 개정한 것이다. 지침에는 “문자의 크기는 높이 12mm 이상이어야 한다”, “단말기 아래 휠체어 사용자의 무릎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 규격을 지켜야 한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진흥원의 홍경순 수석은 “내년 중 패스트푸드점, 카페 등 업종별 키오스크 디자인 지침을 내놓아 제조사들이 따르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지침은 가이드라인으로 강제성은 없다. 문형남 숙명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무인 키오스크가 널리 보급되면서 시민들의 일상으로 들어왔지만 고령층 등의 접근성을 고려해 설계하는 측면은 부족하다”며 “자율 개선이 어렵다면 ‘모범 키오스크 인증 제도’를 도입하는 등의 방안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관련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능정보화 기본법’이 정보 격차 해소 관련 내용을 규정하고 있지만 디지털 취약 계층의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입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디지털 포용 계획을 수립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디지털포용법’이 지난해 1월 발의됐지만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황용석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이제 디지털 기술에 대한 접근은 기본권의 일종이 됐다”며 “기회의 차이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려면 관련 법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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