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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미국에 백지수표는 주지 마라 [특파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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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오픈라운지에서 한-미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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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본영ㅣ워싱턴 특파원

역대 한국 대통령 취임 이래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잡힌 한-미 정상회담이 내일 열린다. 북한 핵·미사일 개발 가속화,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의 중국 견제 강화 등 안팎으로 심각한 상황에서 열리는 회담이라 중요성이 크다. 한국에는 대미 관계 강화의 기회이지만 부담도 따르는 행사다. 윤석열 정부의 조건과 출범 전후 행보를 보면 걱정스러운 대목들도 눈에 들어온다.

첫째, 정상들의 경륜 차이다. 외교 경험이 전무한 윤 대통령은 취임 11일 만에 최강국 대통령과 회담한다. 만 79살인 조 바이든 대통령은 30살에 상원의원이 된 이래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장기간 활동하고 위원장을 두차례 맡았다. 반세기 동안 정치를 하며 부통령도 8년을 했고, 중요한 외교와 분쟁 현장을 누볐다. 다윗과 골리앗도 이 정도 체급 차이는 아니었다. 심각한 정세 속에 미국에 안보를 크게 의존하는 한국의 처지까지 생각하면 미국이 쓸 수 있는 지렛대는 한껏 커진 상태다. 만약 상대를 누르고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제로섬적 관계라면 한쪽이 너무 불리한 구조다. 그나마 동맹국끼리의 회담이고 사전 조율도 한다는 점이 다행이다.

둘째, 전임 정부 대미 외교를 대실패로 규정하는 태도다. 한-미 관계를 ‘복원’한다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관계를 망쳐놨다는 평가를 전제로 한다. 미국 강경파 쪽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접근에 불만을 가졌을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양국 관계가 심각하게 망가졌으니 주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도 외교 실정을 했다고 책망할 텐가?

상대를 깎아내려 반사이득을 보고 지지층을 묶어세우는 효과도 챙기는 게 정치의 기본 생리다. 그러나 승패가 갈린 뒤에는 외교든 그 어떤 다른 정책이든 공익이라는 본래 지향점과 잣대를 되찾아야 한다. 구두 사고 떡볶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선거운동 분위기를 아직 못 벗어난 듯하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드 전환을 못 하고 국내정치적 동기가 회담에 큰 영향을 준다면 곤란하다.

셋째, 패를 쉽게 내보이는 듯한 태도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전 쿼드에 가입하고는 싶지만 여의치 않으니 워킹그룹 참여로부터 시작하겠다고 했다. 한국의 쿼드 가입은 구성국 중 일본이 주로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공개 발언은 미·일에는 쓸데없이 저자세를 보인 것이다. 중국에는 어차피 쿼드 ‘정회원’도 못 되면서 불필요한 견제 메시지만 던진 꼴이다.

사드 추가 배치 공약도 그렇다. 선거운동 때 확언하더니 슬그머니 접었다. 한국 대통령 당선자가 말하는데도 미국은 쿼드 확대와 사드 추가 배치에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계속 오락가락하면 이쪽저쪽에서 신뢰만 잃는다.

마지막으로, 가장 걱정되는 것은 한국의 ‘백지수표’ 발행 가능성이다. 앞서 거론한 세가지 걱정거리가 결국 이것과 이어져 있다. 외교사에서 백지수표는 1914년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무조건 지원을 약속한 사례를 말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믿고 1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었고, 백지수표 발행국 독일은 할 수 없이 휘말려 들어갔다. 백지수표 발행은 국가 간 관계에서도 가장 피해야 할 무모한 행동이다.

워싱턴은 한국 대통령이 선거 때 내놓은 달콤한 말들에 입맛을 다시고 있다. 뭐든지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관계가 ‘복원’된다고 본다면 뒷감당이 어려워질 수 있다. 회담 뒤로도 마찬가지다. 중국, 북한, 경제 관계 등의 사안에서 한국의 조정 능력과 운신의 폭이 보장되지 않는 선언이나 발언에는 신중해야 한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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