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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개떡 같은 손님 다 받으며 악착같이 살아···누구 만나 소주에 삼겹살 먹는 게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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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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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북창동의 밤 거리 모습. 최유진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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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 성매매 여성들의 절절한 이야기


1905년 대전역이 생겼다. 이걸 계기로 대전은 오늘날 인구 145만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 도시의 성장 거점인 대전역 일대에는 커다란 그늘이 생겨났다. 그 그늘 아래에서 어떤 이는 성을 샀고, 어떤 이는 성을 팔았다. 일제가 1916년 대전역 주변에 유곽을 설치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일제가 식민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번성한 ‘유곽’은 홍등가, 사창가, 윤락가, 사창굴, 매음굴 등으로 불리며 오늘의 대전역 성매매집결지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대전역 성매매집결지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 셈이다.

■그곳은 하나의 ‘섬’이었다

여성의 몸이 돈 몇 푼에 팔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성구매자는 여전히 ‘손님’으로 ‘모심’을 받으며 여성을 지배하고 통제했다. 대전의 여성단체 여성인권티움의 조사에 따르면, 대전역 주변인 정동·중동·원동지역에 100여개의 여인숙 또는 쪽방 형태의 성매매업소가 있다. 이 일대에서 성매매를 업으로 살아가는 여성은 150~200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대전역 성매매집결지는 많은 문제를 안은 채 여전히 존재한다. 거기에는 남성의 성적욕망에 대한 ‘묵인’이나 ‘회피’가 그대로 남아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문제라는 이름의 ‘합리화’까지 더해져 있다.

여성인권티움의 전한빛씨는 “누군가에게는 기피하는 공간으로, 누군가에게는 삶의 공간인 채로 ‘벽과 경계’는 더욱 견고해 졌다”면서 “결국 이 성매매집결지는 높다란 경계 속에 은폐된 채 성구매자와 알선자들이 더 많은 자유와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다”고 19일 말했다. 그는 “일그러진 성적욕망을 기본값으로 여성빈곤을 활용한 착취행위를 통해 이익을 얻는 알선자의 구역, 일탈과 배설의 공간이 되어버린 집결지는 대전의 도심 한 가운데에 지금도 엄연히 섬처럼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성매매집결지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성인권티움은 이 일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는 ‘구술 아카이브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를 <아무도 오지 않고 갇혀있는 섬 같아>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어 최근 내놨다. 구술 기록작가 권순지씨가 성매매 여성 당사자, 빈민운동가, 반성매매활동가 등 13명의 이야기를 수집, 기록했다.

■“우울증이 있어도 악착같이 돈 벌고 산 거지”(성매매 여성 A씨)

A씨의 삶은 무력했지만, 최선을 다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의 궤적을 더듬는 동안 ‘우울했다’는 말을 자주 꺼냈다. 우울의 근원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보듬어지지 못한 내면의 아픔이었다. 어린 시절 좋았던 기억은 할머니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밤새도록 술주정을 했다. 집이 싫어서 얼른 나와 버리는 게 꿈이었다. 17세에 집에서 나와 버스 안내양으로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이 곳으로 왔다. 이 곳에 온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돈’이었다. ‘88 서울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1988년, 그는 한 여인숙에서 일을 시작했다. 밥 먹고 대기하다가 ‘콜’이 오면 가서 일했다.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했다. 하루 종일 일해도 몇만원도 못 벌었다. 떼어 줄 거 다 떼어 주고 나면 하루에 2∼3만원이 남았다. ‘개떡 같은 손님(악성손님)’은 자신이 다 받았다. 손님에게 두들겨 맞기도 많이 맞았다. 감금해 놓고 때리는 손님도 있었다. 그래도 난 안 쉬었고, 안 울었다. ‘돈벌려고 나왔으니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관바리’라고 업주가 전화 받아서 여관에 보내주는 시스템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돈을 열심히 벌었다. 그러다 36세부터는 일을 못 했다. 교통사고가 나서 허리를 다쳤기 때문이다. 쉬면서 벌어둔 돈으로 생활하다가 44세에 복귀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동네바리’로 일했다. 동네바리는 여관바리처럼 차 타고 나가는 게 아니고 그 자리, 그 동네에서만 일을 하는 것이다.

엄청 열심히 살았다. 매일, 다른 사람보다 일찍 나갔다. 그리고 늦게까지 일을 했다. 악착같이 아끼면서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돈을 모으기 위해 그렇게 일을 했는데, 52세 되니까 또 몸이 안 좋아졌다. 갱년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래서 더는 일 못 했다. 요즘은 있는 돈 쓰면서 그냥 산다. 우울증은 그대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늘 외롭다. 여동생들 말고는 연락하는 사람도 없다. 결혼할 자신도 없었다. 괜히 결혼했다가 또 사람 구실 못하면 어떡하나, 그 사람한테 피해 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몸이 아프다. 언젠가는 비오는 날 그동안 안 울었던 걸 다 운 적도 있다. 눈물이 안 그쳤다. 길에서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외롭다. 누구 만나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먹는 게 소원이다.

■“행복의 맛을 보게 되면 걸어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성매매 여성 B씨)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불행은 B씨를 이곳으로 내몰았다. 그는 자신의 지내온 상황을 ‘지옥에서 탈출해서 다른 지옥으로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릴 때 엄마를 일찍 잃고 계모 밑에서 엄청난 학대를 받았다. 그때부터 더 강해졌다. 어지간한 불행은 불행으로 못 느낀다. 계모가 학대를 할 때 아버지는 집에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고속버스 운전기사였다.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들어왔을 정도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남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생겼다.

그는 “내가 성장한 가정 자체가 지옥이었는다”면서 “차라리 여기가 덜 지옥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라면서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이 곳에 우연히 정착해 8년을 지냈다. 이 생활을 몇 년 하면 나중엔 병이 온다. 여기 있는 8년 동안 4년은 일하고 4년은 일을 못했다. 제때 못 먹고 너무 시달리다 보니까 사람 기가 허해졌다. 돈을 받았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남자들의 욕설도 참아내야 했다. 여기서 30년, 40년씩 일했다는 언니들을 보면 “진짜 저렇게 눈 뜨고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락이 든다.

제일 힘든 건 아무리 일해도 답이 없는 것이다. 끝이 없는 것, 승부가 안 나는 것이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는 여자들 중 돈을 모은 경우도 있지만, 몸도 정신도 망가진 뒤였다. 늦게나마 자기 행복 찾아보려고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는 요즘 새로운 일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스스로 갖춘 게 너무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좀 보완해서 어떻게든 잘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음지에서 양지로 걸어 나오기까지 그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책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한테 이런 걸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고 스스로 느끼기도 어려웠는데, 책을 읽으면서 자기에 대한 사랑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우리는 자기애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은 안 받아봤으니까요. 행복의 맛을 보게 되면 걸어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B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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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 일대 쪽방촌. 이 주변에 성매매집결지가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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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은 스스로가 생존이 가능한 방법을 찾아가는 것”(빈민운동가·반성매매활동가들의 이야기)

빈민운동가 C씨는 “내가 만난 성매매 여성들 대부분이 삶의 끝자락에 있던 사람들이었다”면서 “40∼50대 여성의 경우는 3만원에서 5만원 사이의 화대를 받기도 했지만, 쪽방 노인들을 상대하는 60∼70대 고령 여성의 경우, 고작 만원 혹은 만원도 못 받는 여성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만 원을 받으면 거기서 방값 3000원을 떼어주고 본인이 7000원을 갖는 구조였다”면서 “심지어는 밥 한 끼를 화대로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빈민운동가 D씨는 역 근처 쪽방생활인들이나 노숙인들이 성매매 수요자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지역에서는 빈곤이 계속 재생산된다는 얘기다. 그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성매매 업소가 있는 동네였고, 우범 지역으로 지정돼 있는 곳”이라면서 “그러다 보니 사람들 통행이 줄어들고 지역 경제 우위에서 밀려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점점 더 유입되고 채워진 동네가 이 동네”라고 설명했다. 그는 “솔직히 쪽방에서 생활하는 사람, 성매매 여성, 청객(손님을 부르는 사람) 등을 일일이 구분하기가 어렵다”면서 “여기서는 다 똑같은 주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성매매활동가 E씨는 “아예 방을 얻어 놓고 24시간 대기하는 여성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라면서 “자기 일상과 성매매가 종일 붙어있는, 분리되지 않는 연속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는 대부분의 성매매 여성은 항상 가난하다”면서 “구조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삶을 유지하는 집결지 여성의 일상 비용은 보통 사람들이 감당하는 비용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예를 들어 꼭 필요한 생활용품을 사려고 해도, 그걸 어디서 어떻게 사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5000원짜리를 1만원에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아무리 벌어도 빚을 갚을 수 없는 중첩적인 착취 구조가 엄연하게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성매매 생활에서 벗어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는 “성매매 생활에서 벗어난 여성은 매일을 새롭게 산다”고 했다. 익숙하게 버스를 타게 된 것도 행복해하고, 시장에 가서 싸게 장 보는 법을 알고도 뿌듯해 한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장아찌를 담가 먹으며 효능감을 얻고, 친구를 만나서 그 친구와 일상 대화를 하는 것도 이 여성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 된다고 했다.

윤희일 선임기자 yh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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